; 춘분을 지내고 부모님 묘소를 돌보며.
춘분이 지난 다음날이 토요일이고 다음 절기가 청명이자, 한식이라 한식전에 성묘를 다녀왔습니다.
춘분은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고 차츰 해가 더 길어지는 날로 동서양을 통해 모두에게 중요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춘분 후 첫 번째 보름달 다음에 오는 일요일을 부활절로 기념하고 지금 한창 전쟁 중인 이란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춘분을 새해의 시작으로 기념하는 가장 큰 명절입니다.
'새로운 날'을 의미하며,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온 것을 축하합니다.
불교에서는 춘분 전후 7일간을 봄의 彼岸피안(언덕너머 저쪽. 미혹의 생존을 此岸차안이라 하여 현세를, 번뇌의 흐름을 넘어선 깨달음 涅槃열반의 세계를 pāra이라 한다)이라 하여 극락왕생의 시기로 보았고 힌두교의 홀리(Holi) 축제 등 다양한 문화권에서 3월 춘분을 전후로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행사를 진행합니다.
왕조실록에는 춘분을 기준으로 조석 두끼를 먹던 밥을 세끼로 먹기 시작하고, 추분(秋分)이 되면 다시 두끼밥으로 환원해 해가 짧은 겨울 동안 세끼밥을 두끼로 줄여 양식을 아꼈다는 기록이 있기도 합니다.
조석 두끼밥 먹다가 세끼밥을 먹기 시작한 날이 밤낮 길이가 같다는 춘분(春分)이요, 두끼밥으로 환원하는 날은 밤낮 길이가 같다가 그날부터 낮이 짧아지는 추분(秋分)이었습니다.
바로 여름 세끼밥이 점심(點心)이죠.
점심이란 말이 정사에 처음 나온 것은 왕조실록의 태종 6년으로 심한 가뭄이 계속되자 임금은 급하지 않은 백성의 부역을 감해주고 각 관청에서의 점심을 폐하는 전갈을 내렸습니다. 당시 관청에서 먹던 점심은 요즈음 같은 식사가 아니라 간단히 모여 먹는 다과입니다.
사헌부 등 중앙관서의 티타임을 점심으로 불렀던 것 같습니다.
참고로 조식으로 흥하고 미식으로 망했다는 로마제국에서도 2식을 했죠.
이래저래 다양한 행사로 환한 춘분을 보내고 바로 다음날인 오늘은 개인적으로 종친분들과 복잡한 한식 시제를 함께 하고 싶지 않아 혼자 선산을 둘러 봅니다.
성묘는 제사음식을 싸가지고 가서 제사를 모시는것이 아니라 살필 성, 무덤 묘를 사용하는 한자인 省墓가 말해주듯 조상의 묘를 손질하고 살피는 일이지만 , 사실상 조상의 묘를 손질하는 것과 배례拜禮(; 절하는 예)가 합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묘(展墓), 배분(拜墳), 배소례(拜掃禮) 또는 상묘의(上墓儀)라고도 부르는데 한식인 음력 3월에는 개사초 改莎草라고하여 겨울부터 봄 사이에 생긴 구덩이를 비롯하여 조상의 묘에 생긴 손상을 손질하여 바로 잡는것으로 이때 부족한 떼(잔디)를 다시 입혀주기도 합니다.
전통적으로 조상의 육체가 묻혀 있는 묘를 관리하는 것은 조상의 영혼을 모셔와 섬기는 제사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겨져왔습니다.
원래 한식에 성묘하는 것은 당나라에서 전래되었는데 고려시대 국가에서는 한식에 종묘와 각 능원에 제향하고, 민간에서는 묘소에 올라가 성묘하였습니다.
주자가례(朱子家禮; 주희(주자)의 가례를 통칭하는 말로, 관혼상제의례를 정리한 예서)에는 3월 상순 묘제 때의 형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덤 안팎을 다니면서 둘러 슬피 살피며 세 번 돈다.
풀과 가시가 있으면 칼이나 도끼, 호미를 사용하여 자르고 김매어 없앤다. 청소를 마치면 돌아와 재배한다.
또한, 무덤왼쪽의 땅을 소제하고 후토신后土神에게 제사 지낸다.
겨울이 지나 풀이 본격적으로 자라기 시작하는 때에 조상의 묘를 살피도록 한 것이죠.
기제사상을 차릴때 소위 ‘棗栗梨柿 조율이시’, ’紅東白西 홍동백서’라고하는 형식이 현대에 와서 근거없이 만들어진것처럼 성묘때 제사상을 차리는것도 고전예법의 정통 형태가 아니고 근대 이후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혼합형 전통’입니다.
‘상차림 없는 성묘’가 원칙이었던 이유는 유학의 예학에서는 공간별로 의례가 다릅니다.
묘는 영혼이 머무는 곳이라기보다 상징적 장소로 제사의 중심은 가정(사당)이기에 묘에서 상을 차리는 것은 원칙적으로 과도한 행위로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상차림 성묘’가 일반화되었을까요?
이건 역사적 변형 과정입니다.
조선 후기에 사당 없는 가정 증가하고 가난한 집에서 집 제사 대신 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일제강점기와 근대화과정에서 명절 성묘는 사실상 야외 제사화 변형된것이지 전통과는 무관합니다.
전통 문헌에 묘에서 상차림 기록은 묘제(墓祭)나 시제(時祭)때만입니다.
잡초를 뽑고 유실된 분을 정비하고 여러가지 이유로 빈 잔디를 정리한후 가볍게 인사하는 성묘는 형식만을 중요시한다는 전통 예학이라기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전통이고 일반화된 묘에서 상차림의 성묘가 오히려 형식에만 집중한 모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상의 묘를 관리한 후에 묘에서 상을 차리는것이야 모시려는 개인적인 마음이 있어서라고 수긍할 수 있지만, 정작 해야할 것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이보다 우스운 일도 없을것입니다.
묘제를 지내면서도 재밌는 모습은 잔을 올릴때 향불 위에서 세 번 돌리는 것은 유학이 아닌 불교문화이고 집에서 지내는 제사에는 잔을 올리고 남은 잔을 내리는 퇴주그릇이 있지만 묘에는 없는데 묘 주변에 세번에 나누어 돌려 붓는 모습도 이것도 근거 없는 행위입니다.
유일한 기록은 종묘 제향에서만 사용되었다고 하며, 선왕 제사 등 다른 국가 제사에서는 보이지 않는 검은 기장으로 양조한 술에 울금향을 섞어 만든 향주인 울창주만입니다
성묘를 마치고 돌아가며 이러저러한 생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