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 허구와 실사가 혼란스런 사도세자
영화 사도가 개봉되었다.
역사의 사실과 영화를 혼돈하면 안된다.
영화는 영화로서 가치를 갖느것이라는걸 알고 보아야 한다.
드라마로 서너번 리메이크된 소설「동의보감」의 허준이 역사 속의 허준이라고 착각 한다든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정사처럼 생각해 진수의 「삼국지」로 잘못 알고 있는것 등 여러가지가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가 아닌이상 실제 역사를 바라는건 영화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것이다.
思悼世子 사도세자
사도세자의 비극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한데,
당쟁의 희생양이라는 설과
사도세자의 광증(100명이 넘는 사람을 죽임)으로 인한 부자 사이의 극단적 불화설 등이 있는데
최근에는 후자 쪽에 비중이 실리고 있다.
(영화는 전자에 포커스를 맞춘것 같다.)
역사를 볼때는 비판적 안목이 필요하다.
특히 정권이 바뀌거나 왕조가 바뀌는 즈음의 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정권의 경우는 더러 재집권하게 되면 조선조의 「實錄실록」과 「修正實錄수정실록」의 사례처럼 자신들의 입장을 충실히 변명할 여지가 있었지만, 왕조가 망한 경우는 변명의 여지가 없이 그대로 사실이 되어 버린다.
그래도 거리낌 없는 史官사관의 대명사인 董狐동호(춘추시대 진나라 사관으로 직필로 후세에 양사로 칭함)를 이상형으로 삼고, 春秋筆法춘추필법(춘추에 나오는 말로 오직 객관적인 사실에만 입각하여 기록하는것)에 대해 귀가 닳도록 듣고 자라서인지, 어쩔 수 없이 왜곡을 하면서도 후대의 독자들이 충분히 다르게 짐작할 수 있는 장치를 남기는 경우도 많았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악행에 대한 「承政院日記승정원일기」의 기록을 없애게 하면서도, 오려낸 부분은 그대로 두었다.
정말 감쪽같이 역사를 왜곡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임금으로서 얼마든지 티나지 않게 베껴 만들어 대체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도리를 다하면서도 역사를 완전히 은폐하고 싶지 않은 지식인의 고뇌 때문이었을 것이다.
역사를 연구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영정조 르네상스」라는 단어를 한번 정도는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런 주장은 보통 사람들에게 별다른 이의 없이 받아들 여져 왔고.
하지만 정조가 훌륭한 군주였다는 근거는 사실 아무곳에도 없다.
1724년 영조(1694-1776)가 조선 제21대 왕에 오른다.
자그마치 53년간 재위했다.
백수를 누리지만 자녀복은 없다.
중전 貞聖王后정성왕후(1692-1757) 서씨와 계비 貞純王后정순왕후(1745-1805) 김씨는 자식을 못 낳았다.
후궁 정빈 이씨가 간신히 孝章世子효장세자(1719-1728)를 낳지만 10살 때 세상을 떠난다.
또 다른 후궁 영빈 이씨가 아들을 낳았는데 이 분이 그 유명한 思悼世子사도세자(1735-1762)다.
이미 69세로 조금 맛이 간 영조는 정치적인 이유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뒤주(쌀 따위의 곡식을 담아 두는 나무 궤짝) 속에 가둬 죽인다.
이때 사도세자 27살.
여기까지가 우리가 역사선생님께 배워온 Fact.
영화에서도 아마 이런 부자사이의 감정과 당쟁, 왕권등으로 이야기를 꾸렸을것이다.
그동안 늘 있어왔던 설명방식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역사책들도 당쟁이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요인이라고 설명한다.
사도세자의 어머니는 선희궁 영빈 이씨,
영조에게 친자식 사도세자에게 대처분을 내리자고 말한 여인이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어머니도 당쟁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명에는 선뜻 동의할 수 없다.
어머니에게 자식의 목숨과 맞바꿀 당파적 이익이 과연 존재했을까...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는 사도세자를 살인자라고 증명하고 있고 학자 중에 사도세자의 살인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더군다나 살인은 살펴볼수록 심각하며 그 살인방식은 매우 끔찍하다.
내관 김한채를 죽였고는 그의 목을 잘라 들고 궁내를 돌아다녔다고 혜경궁 홍씨는 목격담을 남겼다.
그 머리를 들고 드러오오셔 내인들에게 회시하오시니 내가 그때 사람의 머리 버힌 거슬 보아시니...
-한중록
세자 본인의 입으로도 그 사건을 시인하고 내관 김한채를 위해 恤典휼전(관리들이 죽었을 때에 조회를 멈추거나, 장례 비용의 일부를 대주는 일)을 내리도록 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그 후에도 살인을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친자식을 낳은 후궁도 죽였고 점치는 맹인도 죽입니다.
이 사건을 박하원이 자세히적어 「闡幽錄천유록」이라 올리지만 정조는 「待闡錄대천록」이라 명칭까지 바꾸며 금서로 지정했다.
世子戕殺中官內人奴屬將至百餘 而烙刑等慘
세자장살중관내인노속장지백여 이락형등참
세자가 죽인 중관, 내인, 노속이 거의 백여 명에 이르고 낙형 등이 참혹하다.
이는 영조가 직접 말한 내용이며, 세자를 폐하며 발표한 폐세자반교문의 첫머리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방원과 수양대군 등 조선의 왕자 중에도 살인에 관여하고도 왕이 된 왕자들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 살인은 쿠데타나 권력 다툼의 와중에 일어났으며 그 경우에도 왕자가 직접 때려서 사람을 죽인 경우는 드물다.
연산군이 포악하다 하나 직접 손으로 사람을 죽인 경우는 없다.
세자가 무고한 사람을 100여 명이나 직접 살해한 경우는 동서양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汝搏殺王孫之母 여박살왕손지모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지 않았느냐?
나경언의 고변을 듣고 영조가 한 말이다.
박살은 손으로 때려서 죽이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습관적 살인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다음은 친여동생 화완옹주에게도 칼을 들이댔고 그 어머니조차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간신히 죽음에서 벗어나는 사태를 이야기한 선희궁 영빈 이씨의 증언이다
頃日往彼闕幾乎被殺 僅以身免 경일왕피궐기호피살 근이신면
지난번 그곳에 갔다가 거의 죽을 뻔 했는데 간신히 몸만 빠져나왔다
- 廢世子頒敎文 폐세자반교문
그런데도 우리는 사도세자의 살인에는 이상하리만치 너무 관대하다.
1999년 12월 1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공개한 御製 思悼世子墓誌文 어도 사도세자묘지문은 사학계는 발칵 뒤집혔다.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영조의 역할과 심중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충격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한 영조가 아들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참혹한 심경을 토로한 묘지문이 250년 만에 공개된 것이다.
그동안의 관련 자료는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쓴 글이 기록된 <조선왕조실록>과, 정조의 개인 문집인 <홍재전서>가 유일했다.
그동안 존재를 전혀 몰랐던 영조가 직접 쓴 사도세자 묘지문이 나타난 것이다.
음모론자들을 비롯해 그동안 일부에서는 노론과 소론의 정쟁으로 인해 사도세자가 희생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다.
그러나 묘지문 내용을 보면, 음모론자들의 생각이 얼마나 허왕된것인가를 알 수가 있다.
自古無道之君何限 而於世子時若此者 予所未聞
자고로 무도한 임금이 어찌 없다 하리오만, 세자시절에 이런 자는나 들은 바 없었다.
이 묘지문을 통해 정신이 희미한 노인에 의해 내려진 황당한 명이 아님과 아비의 심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뿐만아니라 영조는 사도세자의 묘인 경모궁의 건축계획을 직접 지휘하고 안(案)에 수정을 했을만큼 비통함과 애절함이 있던 아버지였던것이다.
경모궁(景慕宮)은 현 창덕궁 동쪽 서울대학병원 부근에 있었다.
* 어제 묘지문
유명 조선국 사도세자 묘지
사도세자 휘는 선이요. 자는 윤관이라 재위11년을묘년(1735년) 정월 21일 탄생했는데 영빈이 낳았다
나면서 남달리 영특했고, 자라면서 문리 역시 통해 거의 조선의 희망이었다.
오호라! 성인을 배우지 않고 도리어 태갑을 배워 망할 일로 가려고 하니 슬프다.
스스로 깨닫고 마음을 잡기를 가르치고 수시로 말했으나 소인배 무리를 가까이해 장차 나라를 망칠 지경이었다,
오호! 자고로 무도한 임금이 어찌 없다 하리오만, 세자시절에 이런 자는나 들은 바 없었다.
그 근본은 넉넉하고 좋게 태어났으나 마음을 잡지 못해 미치는 데로 흘렀다.
새벽부터 밤까지 태갑의 뉘우침 같은 것을 바랐으나마침내 만고에 없는 일에까지 가서, 머리 센 아버지가 만고에 없는 일을 저지르도록 했구나.
오호라 애석한 것이 그 자태요, 한탄스러운 것이 이 적는 글이다.
슬프다 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내 그를 옳게 가르칠 수 없어 이런 일까지 이르니 어찌 하리오.
슬프다! 13일의 일은 어찌 내가 즐거워서 했으리오.즐거워서 했으리오.
너 만약 일찍 돌아왔다면 어찌 이런 시호가 내려졌으리.
세손 강서원에서 여러날 서로 지키는 것이 어찌 종사를위하며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닐까.
이것이 잘되기를 바라고 소식 없기를 바랬는데, 9일만에 숨길 수 없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너는 어찌 칠십 애비가 이런 지경에 이르도록 했느냐.
이에 이르니 참지 못하노라.
해를 적으면 임오년이오,여름 윤오월하고 이십 일일이라.
이에 도로 호를 회복하고 특별히 시호를내리니 사도라!
슬프다. 근 30년 아비로 은의를 베푼다는 것이 이것에 불과하구나.
이것이 모두 너를 위한 것이구나.
슬프다 신축년 혈맥의 가르침에 다만 세손 식(정조)이 나라를 받들으라는 뜻이 있구나.
7월23일 양주 중랑포 유향(서쪽) 들판에 장사지냈다. 슬프다!
다른 시혜없이 세자빈의 호를 혜로 내려주었다. 이것이 빈에게는 전부였다.
이것은 신하에게 대신 짓게 한 것이 아니다. 누워 불러서 내뜻을 옮겼다.
삼십년의 의리다. 슬프다 사도여! 이에 글지으니 나에게원한 품지 말아라
임술년(1742) 입학하고, 계해년(1743) 관례를 하고,갑자년(1744) 가례를 하는데 풍산홍씨를 취했는데 영의정 봉한의 여식이었다.
영안위 주원의 5대손이다.
빈은 2남 2녀를 낳았는데,하나는 의소세손이고 하나는 현재 세손이라.
가례는 청풍김씨 즉 참판 시묵의 딸과 했다.
부원군의 5대손이다. 장녀는 청연군주이고 차녀는 청선군주이다. 측실 역시 3남 1녀다.
숭정기원후 135년(1762년) 임오 칠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