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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Feb 28.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VI 충청 윤증고택

여섯. 잊혀져가는 도시로의 여행, 논산 둘 윤증고택

윤증.

본관 파평. 송시열의 제자.

조선의 성리학은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지고. 이 의리지학의 적자가 윤증이다.  


사랑채의 당호는 桃源人家도원인가. 낙원...

사랑채 누마루 현판은 離隱時舍이은시사.

세속을 떠나 은둔하며 천시를 연구하는 집.

과거시험 거부.

왕이 18번이나 여러 관직을 내리지만 거부.

그의 별명은 백의정승. 유생으로 단번에 정승의 반열에 오른 정신적인 스타라는 거다.

윤증은 사회변동과 경제적 곤란은 주자학적 의리론과 명분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봤고 송시열은 의리, 윤증은 실리로 스승과 맞붙는다.

어진 스승을 배신했다는 패륜아로 비난받으면서도 송시열과 대립한다

22년 연상의 스승은 노론.

이 괴로운 싸움을 懷尼是非회니시비라고 한다.

회덕에 살던 송시열과 니성에 살던 윤증의 대립한다. 니성은 지금의 논산시 노성면.

지금도 파평 윤씨와 은진 송씨 후손들은 통혼을 하지 않는다.


원래 노성향교는 노성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극심하던 19세기 초 궐리사(조선 시대 공자孔子를 모신 사당)를 노론의 주도로 윤증고택에서 멀지 않은 현 위치로 옮기더니, 30년 후 향교도 윤증고택 바로 옆으로 옮겨버렸다.

소론 영수 집안의 동태를 감시하겠다는 것잉데 이러한 노론의 속셈을 알아챈 선생은 그럴 바에는 모든 것을 보여주자는 차원에서 솟을대문을 없애버렸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다는 거다.

명재 윤증의 어머니는 공주 이씨.

윤증의 부친 윤선거는 1636년 청국의 사신이 왔을 때 유생 들을 거느리고 청나라 사신 용골대를 죽이고 명나라에 대한 의를 지키고자 상소를 올렸다.

그 해 겨울 청태종이 대군을 거느리고 병자호란을 일으키자 윤선거는 부인과 강화도로 피란.

강화가 함락되자 이씨 부인은 오랑캐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으리라하고 강화도에서 순절.

그 어머니에 그 아들.

이에 감격한 왕이 직접 윤증에게 관직에 오르기를 명하니.

 “조정에 나가 벼슬을 하는 것은 어머니의 순절에 대한 보답이 아닌 줄 아옵니다.”하며 사양.

윤증의 어머니는 공주와 같은 품계인 정경부인 등극한다.

1681년 숙종의 명으로 윤증고택 안마당에 열녀 공주 이씨 정려각을 세웠다.  


이경석이 굴욕적인 삼전도 비문 작성으로 송시열은 맹공당한다.

윤증은 옹호한다.실리론

왕도 머리를 조아린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송시열은 사약 받고 현실에 안 나간 윤증은 무병장수한다.

송시열의 제자는 827명으로 최다.


그럼 도대체 평생 돈을 벌어 본 적이 없는 윤증은 어떻게 살 았을까.

부인이 간장 팔아 먹여 살린 거다.

실리론을 주장하면서 정작 자신은 생활비를 벌지 않는 모순이다 .

윤증고택 안마당의 장독은 자그만치 800개.

평소 윤증은 보리밥에, 반찬으로 볶은 소금과 고춧가루만 먹는다.

인근 관리들이 인사드리러 찾아와 식사하는 경우에도 꽁보리밥과 볶은 소금을 윤증과 같이 먹어야한다.

청백리의 표상.

초가집에서 반찬 두개로 버티는 윤증을 위해 제자들이 돈을 모아 1709년 윤증고택 건립하지만 윤증은 너무 거창하다고 이사를 거부한다.

선생이 살던 실제 고택은 현재 酉峯影堂유봉영당자리이며,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윤증 선생이 이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것은 소박한 삶의 태도 때문이다.

이러한 선생의 유지는 지금까지 내려와 현재도 제사상을 매 우 소박하게 차리고 있다. 유언은...  


제사상에 떡을 올려 낭비하지 말 것이며, 일거리가 많은 음식과 기름이 들어가는 전도 올리지 마라.


사랑채 좌우 창문을 열면 동쪽으로는 계룡산이, 남쪽으로는 대둔산이 보인다.

대청마루 양 모퉁이의 팔각기둥은 사람이 이동하거나 집고 올라서기 편하도록 고안된 선현의 지혜.

굴뚝이 낮게 지어진 이유도 서민들을 배려해 연기가 밖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고.

윤증은 '이(利)'를 따라 행하면 마을 사람들 원망이 많다 하여 양잠을 금지시켰고. 또한 주변 공동체에 대한 배려 방안으로 의전(義田)과 의창(義創) 제도 운영하여 배고픈 사람들이 가져 갈 수 있도록 집 밖에 쌀을 싸 놓는 거다.

특이하게도 명재고택에는 행랑채가 없다.

조선시대 때 노비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나뉜다.

솔거노비는 주인과 같이 거주하거나 가까운 곳에 거주하며 노동력을 제공하고 의식주를 제공 받는다.

외거노비는 주인과 따로 거주하며 별도의 호적을 가진다.

따로 가정을 꾸리고 재산소유도 가능하고.

그러니 윤증고택은 이미 노비의 독립성을 인정한 민주적인 사대부 집안이었던 거다.

시대를 앞서가는 존경스러운 집안인거다.

12대 종손인 윤완식은 7남매의 둘째 아들.

1975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 형도 12년 전 작고하자 그 가 ‘종손’을 대행하고 있다. 형에게는 아들이 없어 윤완식의 큰 아들이 종손의 대를 잇고 있고. 윤완식의 증조부 윤하중은 천문학자. 신학문을 빨리 받아들인 윤하중은 1년에 한번 손자, 손녀들을 불러 모아 1년 계획서를 제출하게 했다. 그 내용은 용돈을 주는 거.

1939년 흉년이 들어 마을 사람들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이를 돕기 위해 윤하중은 노성과 상월에 신작로를 쌓는 공사를 일부러 벌였다. 석축을 쌓는데 참여한 마을 사람들에게 노임으로 쌀을 주었다. 서민들의 자존심을 세워 주려는 배려.  

해방이 되고 고향인 논산에 돌아온 박희동은 농사꾼. 6·25전쟁이 발발하자 전투기 조종사 지원. 김구 선생의 아들인 김신 등 10명은 일본에 가서 미군의 첨단전투기인 무스탕을 인수해서 6·25에 곧바로 투입. 박희동장군은 자신의 고향마을이자 명재고택이 있는 논산 노성리에 폭격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폭탄을 다른데 떨어트렸다. 그래서 윤증고택은 살아나고.  

생일을 맞이하면 다른 집안들은 생일잔치를 하는데, 명재 집안은 생일잔치를 생략하고 그 대신 마을 사람들에게 쌀을 나누어준다.

이런 전통 때문에 서울에서 시집 온 며느리들은 이날까지 생일상을 한 번도 못 받았다.  

주소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

윤증고택은 중요민속자료 제1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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