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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Feb 29.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III 경상 안동

일곱. 밀양을 중심으로 좌 안동 우 함양, 그 세번째 마을 안동

養眞堂 양진당

遠志精舍 원지정사


하회마을은 1994년부터 입장료 받기 시작한 이래 입장객 1천만 명 돌파했다.

매년 방문객 1백만 명에 육박하니 바글바글하다.

관광객 실은 마차는 연실 실어 나르고 완전 민속촌 버전이 되며 망가져 가고 있다.

현재 하회마을은 초가집 126호, 기와집 98호 등 총 296호이고 거주 인구는 102호 200여명으로 태반이 비어 있다.

각 주민은 민박, 먹을거리 장사, 농사 병행한다.


너무도 유명한 養眞堂양진당.

보물 제306호.

유성룡의 형인 유운룡(1539∼1601)의 종택으로 풍산 유씨 종가.

유운룡의 아버지인 입암 유중영(1515∼1573)의 고택이라는 뜻으로 立巖古宅입암고택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바위를 세운다

立巖 입암 은 과거 급제 후 황해도 관찰사, 국왕에게 경서를 강연하는 가장 명예로운 벼슬인 경연관을 지냈다.

과거급제한 류중영은 대대로 살던 고향은 너무 자갈이 많아서 집안의 번창을 위해 전국 유람에 나섰다

당시대의 거목 퇴계선생의 도산서원을 찾았다.

부용대 앞으로 부지를 소개해 준다.

높이 64m의 연꽃이 피어나는 언덕, 부용대芙蓉臺에 올라서 낙동강이 휘감고 도는 160만평의 명당, 하회마을을 찾은것다.

물이 도는 마을, 하회. 토박이 허씨, 안씨 문중을 찾아 인사하고 정착한다.

양진당이라는 당호는 유운룡의 6대손인 유영(1687∼176 1)의 아호로 진리를 기르는 집이란 뜻이다.

집 지을 당시에는 99칸이었지만 지금은 53칸.

학문의 요체란 성현의 언행을 통해 자신의 심신을 연마하는데 있는 것으로

자구의 해석에 매몰되어서는 안된다.- 퇴계

이게 겸암 평생 화두다.

형님은 천성이 깨끗하고 절개가 있었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했다.

사람을 대할 때 구차하게 영합하지도 않았고 뜻에 맞지 않는다고 내 색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젊었을 때는 친구들 사이에 너무 고상하고 강직하다는 이 유로 꺼리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만년에는 도의의 문에 들어가 연마하고 시서의 가르침에 몰 입함으로써 화평과 온후함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과 어울려 종일토록 마시고 먹으며 담소를 나누면서 피곤함을 잊을 정도였다.

- 류성룡


1542년 둘째 류성룡 출생.

명당 덕에 불세출의 영웅이 나온 것.

호 서애西厓.

서쪽의 언덕이 너무 아름다움.

퇴계에 사사받고 25살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다.

전국 10등 안 에 든 수재.

28세 때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베이징의 학자들과 붙었다.


진헌장(1428-1500, 명나라 유학자)은 도를 깨달은 것이 정밀치 못하고 왕양명( 1472-1529, 명나라 유학자)은 선학 禪學으로 얼굴만 바꾸었으니, 설선(1389-1464, 명나라 유 학자) 학문의 순정(純正 순수하고 올바름)함만 못하다.


1573년 부친 위독하다는 연락 받고 하회마을로 내려와 부친 임종 지키고 벼슬 버리고 3년 상에 들어갑니다. 낙동강을 바라보고 서니 회한이...

5칸 규모의 서재 건립하고 현판을 걸었다.

遠志精舍원지정사. 

원대한 뜻을 펼치는 공부방.

일단 당호에 정사가 들어가면 현실과 담을 쌓고 공부하겠다는 뜻.

병산서원 건축가답게 서재 좌측에 2층 누각을 지었는데 정사각형 4칸 규모의 누마루는 날아갈 듯 경쾌하다.

현판은 燕坐樓연좌루. 

고요히 앉아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집.

류성룡은 임진왜란으로 이듬해 상경하여 군총사령관이 되니 왜적들이 하회마을에 들이닥쳐 불 지른다.

1781년 중건.

중요민속 자료 제85호.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건축물은 130개. 그중 하나.

원지정사.

송림 너머로 낙동 강은 흐르고 부용대위에서는 연꽃이 파도를 치고 만 그루 의 소나무로 우거진 이곳 만송정은 최근 천연기념물로 지정 예고됐다.


서애가 직접 남긴 원지정사 기문(記文 집의 건립배경을 기 록한글).


정사를 북림北林에 지으니 무릇 오칸 집이다.

동쪽은 당堂 이라 하고 서쪽은 재齋라고 하였으며 재로 말미암아 북으로 나가다가 한번 꺾어 서쪽 높은 곳에 누樓를 지어 강물을 굽 어볼 수 있게 하였다.

편액의 이름을 원지遠志라 하니 객들 이 내게 그 뜻을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원지는 본 래 약초이름으로 일명 소초小草라고도 한다.

옛날 진나라 사람이 사안(謝安 320~385, 중국의 재상)에게 묻기를 ‘원지와 소초는 하나의 물건인데 어찌 두 가지 이름 인가' 하니, 어떤 이가 답하기를 '산중에 은거해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을 닦을 때는 원지라고 하고, 세상에 나와 벼슬을 할 때는 소초라고 한다’ 고 하니 사안은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다.

나는 산중에 있을 때도 진실로 원대한 뜻이 없었고 세상에 나와서는 소초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와 서로 닮은꼴이다.

이러한 것을 유추해 그 뜻을 당겨왔다.

원지정사 터를 북림이라고 한다.

마을이 하도 넓어서 동서로 길을 내고 남촌, 북촌으로 갈랐던 것이다.

원지정사 터는 소나무 우거진 북촌.

송림 사이로 나룻배도 보인다.

높이 64m의 芙蓉臺부용대가 서 있고 마을 밖으로 나와 하회마을 삼거리에서 일직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광덕교.

이를 건너자 마자 다시 좌회전하여 비포장 500m 가면 병산서원 비슷한 누마루, 화천서원.

연꽃이 흘러 내려가는 강변의 서원으로 2층 누마루 현판은 이렇다.

地山樓지산루.

안으로 지극히 높은 덕이 있지만 나를 낮추겠다.

병산서원 설계자 서애가 화천서원에 모셔진 겸암 유운룡의 동생이라 병산서원과 흡사하다.

하지만, 건물을 보려고 하지 말고 누마루에 앉아 밖을 바라보면 풍광은 다르다.  

이제, 양진당이나 충효당은 너무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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