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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Mar 02.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V 전라 군산 근대건축 군산세관

열. 근대건축의 보루…군산 04 군산세관

개항...군산의 근대건축 03

구 군산세관 본관


군산이 근대도시로 변모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개항’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직접적인 결과물이 내항의 구 군산세관 본관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2011년 문을 연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왼편에 자리한 자그마한 벽돌 건물 하나.

군산항이 개항된 것은 1899년 5월 1일.

개항과 더불어 租界조계 조약이 체결되고 개항장이 설치 되면서 군산에는 옥구감리서 외에 일본목포영사관 군산분관이 설치되었고 또한 警務署경무서와 海關해관(청나라가 17세기 외국과의 무역을 위해 항구에 설치하고 관세를 징수한데서 유래)등이 설치되었다

고려 때는 진성창 조선 때는 칠읍해창이 있던 물류유통의 중심지다.

1905년 이후 일본이 우리 해관의 모든 권한을 독점하고, 1908년 우리 해관을 일본 세관의 일부로 흡수, 통합하는 과정에서 세관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구 군산세관 본관은 바로 그 시기에 지어진 건축물로 1906년 인천세관 군산지사를 설립하고 청사 건립을 계획하여 1907년 7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약 10개월 후인 1908년 5월에 준공하였다.

군산세관과 비슷한 시기에 인천, 부산, 목포, 원산, 진남포 등 여러 개항장에도 세관이 지어졌다.

인천이나 부산에 지어졌던 세관은 군산세관에 비해 그 규모가 훨씬 크고 웅장한 건축물이었으나 당시에 지어졌던 세관 중 군산세관 만이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다.

대한제국 정부가 여러 개항장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했던 행정기구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단 하나의 물리적인 흔적이 구 군산세관 본관 건물인 셈이다.

당시 군산세관 신축공사는 군산항 건설 공사의 일부였다.

군산세관 주변으로 항만 건설을 위한 해안 매립공사와 선박 접안을 위한 잔교가설공사 등이 동시에 진행되었고 근대적인 항구로서 군산항은 구 군산세관 본관에 인접한 해안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내항의 물리적 형태가 완성되는 1930년대까지 계속된 지속적인 매립공사로 구 군산세관 본관은 해안과는 멀리 떨어진 건물이 되어 버렸다.


벨기에에서 수입해 온 적벽돌로 되어 있는 유럽 양식의 건물로, 서울역사와 한국은행본점 건물과 같은 양식이다.

한국 근대 신고전주의 건축의 대표작.

신고전주의는 그리스, 로마로 돌아가자는 것이고.

바깥벽은 붉은 벽돌이지만 내부는 목조로 건축했으며, 슬레이트와 동판으로 지붕을 올리고 그 위에 세 개의 뾰족한 탑을 세웠다.

전면 현관 상부는 완만한 곡선의 아치를 만들고 뒤쪽에 다시 박공벽을 구성하여 높은 지붕면과 박공면이 조화를 이루며 입구성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은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세관 내에서 제일 먼저 보이는 건 세관장실.

한쪽 구석에는 시대별로 제복들이 전시되어 있다.

세관 직원들이 제복을 입는 이유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40여 명이 근무했던 세관 내부는 목조로 되어 있고 내부 기둥에는 벽난로의 흔적이 있다.

건물 어디를 봐도 냉난방을 한 흔적은 없고 벽난로가 유일하다.

정면 중앙의 출입구는 화강석으로 마감하였고 바깥벽은 붉은 벽돌을 쌓았다.

특이한 것은 뾰족한 지붕을 얹은 것인데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안정되고 무게감 있는 외관을 보여주고 있다.


정문을 들어오면 사무실.

사무실의 창턱은 매우 높다.

내부가 잘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조선인 민원인들은 직원들에게 고개를 올려다보고 민원을 해결해야 하는 다소 권위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경비원도 늘 2~3명 상주했으며 문제가 발생하면 언제든지 민원인들을 끌어내었다고 한다.

출입시에는 몸수색까지 했을 정도라 하니 그 살벌했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건물의 효율성을 위해 복도가 한쪽에만 설치되어 있고 내부공간은 거의 대칭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천장의 조명 등은 지금은 수수해보이지만 화려한 옛 흔적이 남아 있고.

대한제국 시기 이곳에서는 밤에 각종 행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마을 주민이 몰래 구경하다 붙잡혀 뭇매를 맞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이 건물은 건축사적 의미 외에 곡창 지대인 호남지방에서 쌀 등을 빼앗아 가던 일본 제국주의의 체취가 묻어나는 또 다른 현장이다.

부둣가에 탑처럼 쌀을 쌓아놓은 풍경...

군산의 일본인들은 군산이 ‘쌀의 군산’으로 호명되는 걸 은근히 자랑했다.

‘쌀의 군산’은 테라우치 조선총독이 군산을 방문했을 때 불렀다는 말이 있다.


1934년 군산항 쌀 수출량은 약 220만 석으로, 전국 수출량 약 770만석과 비교하면 상당히 높은 비중이었다.

같은 해 군산항 총 수출량의 73% 이상이 쌀이었다.

이 근대유산도 한때 철거될 위기에 처했으나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재임하였던 61대 방길남 세관장에 의해 보존되었다.

당시 새로운 청사를 짓기 위하여 헐어버릴 것인지 아니면 역사의 가치를 지닌 건물로서 후대를 위하여 남겨둘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팽팽하였다.

그러나 당시 방길남 세관장이 군산세관의 얼이 담겨 있는 이 건물을 역사의 한 부분으로 남겨놓아야 한다고 강하게 설득하여 건물이 헐리지 않고 현존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일제의 잔재 청산이라는 명목 아래 서울 중앙청을 비롯하여 일제시대의 건물들이 하나둘 사라지던 때였으니까.


전북 군산시 장미동 49-38

전북기념물 제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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