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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Mar 04.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III 경상 도산서원

아홉. 밀양을 중심으로 좌 안동 우 함양, 그 세번째 마을 안동 도산서원

예로부터 경상도 사람들이 꼽았던

영남의 4대 길지는

경주 안강의 양동마을과 안동 도산의 토계부근,

안동의 하회마을, 봉화의 닭실마을

이다.

네곳 모두가 사람이 모여 살 만한 곳으로 대부분 산과 물이 어우러져 경치가 좋고 들판이 넓어 살림살이가 넉넉하다.

특히 낙동강 범람으로 만들어진 저습지를 개간한 하회마을 입구의 풍산평야는 안동일대에서 가장 넓은평야이며, 또 양동마을 건너편에는 형산강을 낀 안강평야가 발달해 있다.

이중환은 이중 영남 예안의 도산과 안동의 하회를 우리나라 시냇가에서 가장 살 만한 곳으로 꼽았다.

도산은 두 산줄기가 합쳐져서 긴 골짜기를 만들었는데, 산이 그리 높지 않다.

태백의 황지에서 비롯된 낙동강이 이곳에 와서 비로소 커지고 골짜기의 입구에 이르러서는 큰 시냇물이 되었다


지금의 도산서원 일대는 안동댐으로 더욱 드넓어져 바다와 같지만 그때의 퇴계마을은 현재 안동댐에 수몰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 지형을 찾아볼 수가 없다.


퇴계 이황 退溪 李滉.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은혜리 생.

원래 이 동네 이름은 의동면이었으나 1914년 도산서원을 따라 동네이름도 바뀌었다.

부친은 진사이식이고 첫 부인 의성김씨는 2남 1녀 낳고 별세. 재취한 춘천 박씨가 낳은 5형제 중 막내.

태어난지 7개월 만에 부친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농사 지어 8남매 건사하게 된다.

본관은 지성.

조선시대 58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한 명문가다.

23세에 성균관 입학하고 34세에 式年文科식년문과(조선의 정시과거시험은 자,묘,오,유가 들어가는 해에 3년마다 개최했는데 이해가 식년) 을과 급제한다.

(* 문과 33명 무과 28명의 합격생 중 문과 합격생은 다시 1-3 등의 갑과, 4-10등까지의 을과로 등수를 매겨 관직을 주는것인데, 갑과의 1등은 당연히 장원이라는거고.)

43세에 대사성에 오르지만 도성은 당파싸움으로 시끌벅적하니 낙향해서 고향에 양진암 짓고 안빈낙도.

단양군수로 한양에서 임명장이 왔지만 고사해서 호 역시 벼슬에서 물러나 시냇물을 벗삼아 산다는 의미의 退溪퇴계로 바꾼거다.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9개월 만에 사직하게 된다.

첫 부인 허씨에 이어 둘째 부인 권씨, 둘째아들도 죽게 된다.  

풍기군수로 가라고 다시 임명장이 오고.

백운동서원이 폐가로 버려져 있는걸 보고 살려야 한다는 장계를 올린다.

그래 학문으로 일가 이루고, 청렴결백하여 백운동서원은 왕으로부터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을 받고 조선최초의 사액서원이 된다.


1560년 工曹參判공조참판의 벼슬을 내놓고 1년 만에 다시 사직한 후 완전 낙향하여 도산서당 차린다.

陶山도산은 이 서원뒤에 있는 산이 질그릇처럼 생겨서 질그릇처럼 투박한 서원이라하여 이름이 된것이다.

학비 공짜인 조선 최고의 사설학원.

젊은이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어 부랴부랴 濃雲精舍농운정사(기숙사로 아주 짙은 구름이 드리워진 정신을 수양하는 집)을 건립한다.

그 옆에

巖棲軒암서헌(마루로 바위위에서 쉰다.),

琓樂齋완락재(퇴계 거처로 즐겁고 편안한 곳),

觀瀾軒관란헌(쉬기도하고 자연을 완상하는곳으로 물결을 바라보는 곳),

亦樂書齋역락서재(기숙사),

동재 博約齋박약재(博文約禮박문약례 : 학문은 넓히고 예절은 지킨다),

서재 弘毅齋홍의재(마음은 넓고 뜻은 굳세게),

光明室광명실(서재로 萬卷書籍惠我光明만권의 서적이 나에게 광명을 준다에서 따왔다),

進道門진도문(도산서원의 정문) 등의 건물을 지은 후 모두 자필로 현판을 썼다.

1570년 운명하며 유언을 남긴다.


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하고, 비석도 세우지 말 것.


퇴계의 부음을 들은 이율곡은 통곡하면서 만사를 짓고 제문을 바친다.


선생은 세상의 儒宗유종이 되셨다.

정암 조광조 이후에 견줄 만한 사람이 없다.

才調재조와 器局기국은 혹 정암에 미치지 못한다해도 의리를 탐구하고 精微정미함을 다 한데 이르러서는 정암 또한 미칠 수 없는 정도였다


도산서당 뒤편의 도산서원이 세워진 것은 1574 (선조 7년)이다.

서원을 창건하여 퇴계 이황을 배향하고, 그다음 해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도산서원」의 넉자는 선조의 명으로 조선 중기의 명필인 한석봉이 썼고 뒤에 퇴계의 제자 월천 조목을 추배하였다.

앞에 있는 典敎堂전교당은 보물 제210호로, 뒤에 있는 尙德祠상덕사는 보물 제211호.

그래 젤 끝에는 사당을 놓고

1층은 도산서당와 농운정사를,

2층엔 동서 광명실로 책을 보관하는 2층 다락집 형태의 도서실이 되고

3층은 전교당,

4층은 상,하 고직(庫直:창고지기)사,  

5층은 존덕사가 된거다.

서애 류성룡은 스승이 그려 놓은 도산서원을 자세히 들여다 보다 병산서원이 만들어지게 된다.

1871년 대원군은 전국에 서원철폐령을 내리지만 도산서원은 건드리지 못한다.

주차장으로 나오면 이육사기념관이 근처에 있다는 입간판이 보인다.

이육사선생이 이 동네에 계신것은 이육사는 퇴계의 14대손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굽이굽이 비포장의 오솔길을 따라가면 강 건너에 정자가 하나 보이는데 그것은 試士壇시사단.

평소 퇴계를 흡모해 오던 정조는 1792년 규장각 각신 이만수를 도산서원에 보내 제사를 지내고 그곳 송림에서 영남 인재를 선발하는 별시를 치른다.

7,000명이 모여들고 이를 기념하기위해 1796년 여기에 단을 모으고 비와 비각을 세웠다.

비각은 원래 도산서원과 마주보는 강변송림 안에 세워져 있었는데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인한 수몰로 송림은 없어지고, 단을 지상 10m 높이로 쌓아 옛 건물과 비를 그대로 옮겼다.

토계리 680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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