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실학자(?) 정약용 3/7
노비제도 다산과 다산 외 성리학자들
; 두번째이야기 성리학자들의 노비에대한 생각
우리가 배워온 허학(?) 성리학자들의 노비에 대한 의견을 풀어본다.
분명 유학에의해 노비정책의 강력한 지지를 해야하는것이 우리 역사교육의 자연스러운 이야기 였다.
과연 그럴까...
익히들어 알고 있는 이름의 성리학자들은 조선이 건국된 이래로 줄곳 노비해방을 위해 노력해 왔다.
우선, 역사 속에서 배신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신숙주.
늦었지만 최근들어 광해를 새롭게 해석하게되면서 반정으로 왕위를 오르게된 인조측에 선 인물들을 폭군을 몰아낸것이 아니라는 재평가 하고 있다.
아직은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하지만 세조의 편에 섰던 신숙주는 훌륭한 학자였다.
형장에 끌려가는 순간까지 당당하였던 성삼문에 대척점에 서 있었던 신숙주의 평가는 유보한다.
이유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끼어 있었던 인물이니 정치의 문제가 된것인지라.
10살도 안 되는 소년 왕을 위해 절개를 지키는 것이 대의일까, 민중의 편에 섬이 대의가 아닐까...
이런 논의는 판단에 어려움이 따른다.
어쨌든...
국조보감 제28권에 보면 신숙주의 글을 확인 할 수 있다.
… 신의 계책은 전에 이미 발의되었다가 다시 중지되었는데, 지금 와서도 더욱 별다른 대책이 없습니다.
따라서 신의 말을 쓰신다면 서얼과 공천ㆍ사천 중에서 무재가 있는 자를 모집하여 스스로 식량을 준비해서 남도와 북도에 들어가 방수하게 하되, 북도는 1년, 남도는 20개월을 기한으로 하여 응모자가 많도록 하는 한편 병조에서 시재한 뒤 보내게 하소서.
그리하여 서얼은 벼슬길을 터주고 천예는 면천하여 양인이 되게 하며, 사천인 경우에는 반드시 본주인이 병조에 단자를 올린 다음에 시재를 허락하여 주인을 배반하는 종이 없게 하고, 그 대신자는 자원에 따라 골라 주게 하소서.
그리고 만약 무재가 없는 경우에는 남ㆍ북도에 곡식을 바치게 하되 멀고 가까운 거리에 따라 그 많고 적은 수를 정하고, 벼슬길을 터주고 양인이 되게 하는 것도 무사와 똑같이 해주소서.
그러면 군사와 양식이 조금은 방어에 대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서얼의 등과, 면천등 조선의 신분제의 맹점을 전면으로 대치하는 주장을 펴고 있다.
율곡의 상소문을 통해 선조는 서얼과 공천ㆍ사천에게 벼슬길을 터주고 양인이 될 수 있는 길을 터주도록 다시 명했다.
또한 雜著잡저 東湖問答동호문답에서는 종모법 주장하면서 노비를 줄이려 하였다.
박세당이 쓴 이경억의 묘비명에는
‘아버지 어머니 중 어느 쪽이건 노비이면 자식이 노비가 되는 구례로 노비가 늘어나고 양민이 줄어든다. 지금부터는 노비 증가를 막는 법을 시행하자.’
라고 서계집 제12권에 적고 있다.
구례에 공사의 노비는 아비가 양인이고 어미가 천인이면 어미의 신분을 따르고, 어미가 양인이고 아비가 천인이면 아비의 신분을 따랐습니다.
이 때문에 천례가 날로 불어나고 양민(良民)이 날로 줄어드니, 지금부터는 사내는 아비의 신분을 따르고 계집은 어미의 신분을 따라 고르게 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공의 의견대로 하고 이를 법으로 정하였다.
유수원도 迂書우서를 통해 贖良속량을 주장하고 있었다.
인조반정으로 재 등용된 좌의정에 올랐던 성리학의 대가, 趙翼조익의 浦渚集포저집에는 노비제도를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지 일목요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내용이 너무 길다보니 전체를 올리지 못하겠네요. 필요하시면 올려드리지요)
이렇듯 조선 성리학자들 중에서 끊임없이 제기하였던 노비해방의 노력은 우리가 역사공부를 하면 단 한번도 배워보지 못한 내용이다.
조선선비들이 사노비가 많아서 국가 운영의 어려움을 개탄하였다.
이에 반해 다산의 있지도 않은 노비해방에 관한 주장은 은연중에 우리의 뇌 깊숙히 잠식했던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노비해방을 반대하는 정도가 아니라 영조가 노비를 양인으로 바꾸려는 법을 제정한 역사적 사례에도 반대하고, 심지어 정조까지 노비축소를 위하여 노력을 기울였던 바를 거스르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