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의 역사 읽기 IV 근현대사

세번째. 광복에서 분단까지 02 10월 대구항쟁

by Architect Y

정부 수립전 항쟁 01. 10월 대구 항쟁


미군은 점령하듯이 남한을 손에 넣은 후 미 군정은 스스로를 일제의 총독부와 동일시하였고 일제가 이 땅위에 설치해 놓은 모든 기구들과 민중을 탄압하는 압제적 법령들을 고스란히 인수하여 다시 사용하였다.

반민족 친일분자들이 미 군정 주위에 포진하였고 반봉건적인 지주 소작관계는 근본적 개혁없이 계속 이어지며 일제가 만들어 놓은 경찰기구를 그대로 인수하여 운용하여 식민통치체제의 억압을 유지해 나갔다.

그 결과 경찰 간부의 80%가 반민족 친일인사들로 채워졌다.


미 군정이 1945년 11월 2일 발령한 「군정법령 21호」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앞으로 새로운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혹은 앞서 폐기된 것이 아닌 모든 현행법과 과거의 총독부가 공포한 규정, 명령, 지시 및 각종 문서들 중에서 1945 년 8 월 9 일까지 유효했던것은 합법적 당국(미 군정)에 의하여 폐기될 때까지 계속 발효한다.


法令 第二十一號

一, 法律의 存續

二, 布告, 法令, 指令의 施行

三, 本令의 實施期日

第一條 法律의 存續

모든 法律 또한 朝鮮舊政府가 發布하고 法律的 效力을 有한 規則, 命令 告示 其 其他 文書로서 一九四五年八月九日 實行中인 것은 其間 이의 廢止된 것을 除하고 朝鮮軍政府의 特殊命令으로 廢止할 때까지 全效力으로 此를 存續함. 地方의 諸般法規와 慣例는 當該官廳에서 廢止할 때까지 其效力을 繼續함. 法律의 規定으로서 朝鮮總督府, 道廳, 府, 面, 村의 組織과 局長, 課長, 府尹, 郡守, 警察署長, 稅務署長, 面長, 村長, 其他 下級職員에 關한 것은 軍政長官의 命令으로 改正 又는 廢止된 것을 除하고 當該官廳에서 廢止할 때까지 此를 存續함. 上司의 指令에 從하여 從來 朝鮮總督이 行使하는 諸般職權은 軍政長官이 行使함을 得함.

第二條 布告, 法令, 指令의 施行

北緯 三八度 以南 朝鮮의 모든 裁判所는 朝鮮의 法令, 美國太平洋陸軍總司令官의 布告의 諸規定 及 朝鮮軍政長官의 모든 命令 及 法令을 主義 施行할 事. 此 目的을 爲하여 如斯한 모든 裁判所로 玆에 陸軍占領裁判所를 構成함. 本令의 條文에 依하여 如斯한 裁判所에 美國 또는 聯合國의 軍人 또는 管理에 對하여 裁判官割拳을 附與하든가 又는 在朝鮮美國陸軍이 설립한 軍政委員會, 憲兵裁判所 其他 陸軍裁判所에 附與한 裁判管轄權을 剝奪치 못함.

第三條 本令의 實施期日

本令은 一九四五年十一月二日 夜半에 效力을 生함

一九四五年十一月二日

在朝鮮美國陸軍司令官의 指令에 依하여

朝鮮軍政長官

美國陸軍小將 A. B. 아놀드


그래

1907년의 치안유지법,

1908 년의 군사법령,

1910 년의 정치집회금지법,

1936 년의 선동문서통제령등 악명 높은 일제시대의 법령들이 「군정법령 21호」를 근거로 그 효력을 그대로 유지하게 되었으며, 미 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은 1912년에 제정된 일제의 법령을 근거로 하여 1946년 가을, 애국지사들에 대한 예비검속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1945년 10월 15일 전라북도 남원에서 발생한 건준의 국군준비대와 경찰과의 충돌사건을 빌미로 미 군정은 국군준비대를 강압적으로 해체시키고 그 간부들을 체포하여 중형에 처하는 한편 국방경비대 창설 작업에 착수하였다.

국방경비대의 수뇌부 또한 경찰과 마찬가지로 과거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하수인으로 독립투사들을 체포하고 살육하는데 앞장섰던 친일 반역자들로 채워졌다.

국군경비대 초대 사령관인 원용덕을 위시하여 채병덕, 장도영, 정일권, 박정희 등이 모두 일제의 말단 하급장교 출신이었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이후부터는 미 군정의 시책에 반대하거나 협조하지 않는 모든 애국적 정당과 민주단체들이 불법화되었고 민중지도자들에 대한 대규모 검거선풍이 휘몰아쳤다.

「매일신보」, 「인민일보」 등 애국적 언론들은 폐간처분을 당하거나 엄격한 검열제 실시로 그 활동에 결정적 제약을 받았다.

일제에 철저히 예속된 식민지 경제에 기반하였던 남한경제는 일제의 패망 이후 제조업 분야의 90%가 가동이 중지되는등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고 남북 분단으로 인한 기형적 경제 구도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었다.

화학, 전력, 비료 등은 남한내 생산이 전무한 상태였고 식량 또한 절대량이 부족하여 민중들 대다수가 절대빈곤상태에 놓였다.


미 군정은 출범 직후인 1945년 12월 6일 법령 제33호 「조선 내 소재 일본인 재산권 취득에 관한 건」을 공포 시행하여 전체 남한 재산의 80%에 달하는 구 일본인 재산을 모두 군정청에 귀속시키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이 법령을 근거로 하여 일제 패망 이후 노동자들의 자주적 관리하에 있었던 대부분의 공장과 은행들이 미 군정의 소유로 넘어가게 되었으며, 이와 함께 토지 등 각종 자원이 일제의 식민지 수탈 기관이던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후신인 신한공사로 모두 귀속되었다.


해방 이후 지방인민위원회가 주체가 되어 일본인 소유의 토지나 농지들은 현지 농민들에게 분배하여 경작케 하였는데 다시 미 군정에게 빼앗기는 현실에 많은 농민들의 저항 또한 전국 곳곳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1946년 3월과 4월에는 소년, 소녀 노동자를 포함한 수천명의 노동자와 시민들이 서울 시청으로 몰려가 쌀을 달라는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1945년 11월 초에는 남한내 최대 노동조합인 「조선노동자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가 결성되었고,

1945년 12월 8일에는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이하 전농)이 결성되었다.

이밖에도 다양한 대중조직들이 결성되어 미 군정과 그 하수인들에게 대항하여 투쟁해 나갔다.

1946년 2월 15일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을 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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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전은 결성대회에서 다음과 같은 민전의 3대 원칙적 노선을 발표하였다.

1. 특정 계급이 아닌 조선의 모든 애국적 민주 세력의 공동전선이고,

2. 제국주의 침략세력과 그 하수인격인 일체의 매국도당에 대한 공동의 투쟁기관이며,

3. 자주적이며 민주적인 통일정부를 위한 공동의 준비기관이다.


1946년 9월 24일 부산지구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으로 인쇄, 전기, 체신, 토건 등 전 부문으로 파급되었으며 초기에는 임금 인상, 해고 감원 반대 등 노동자의 처우개선에 한정되어 있었으나 점차 요구조건도 쌀 배급의 증가, 노동자의 결사의 자유 보장, 민주적 노동법 제정, 정치범 석방 등 보다 정치적 성격을 띠어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모든 권력은 인민위원회로'라는 혁명적 슬로건까지 외치게 되었다.

파업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진행되는 동안 학생들은 동맹 휴학 등을 통해 투쟁의 대열에 합류하였고 조선, 동아를 제외 한 대부분의 민주적 신문들도 파업 목적에 동조하는 기사를 발표하였다.

끈질긴 노동자들의 단결된 가열찬 파업 투쟁은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을 투쟁에 동참케 하였고 급기야 10 월 대구 민중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1946 년 10월 1일

9.24 총파업을 지지하는 대구의 400 여개 공장의 노동자들과 학생 및 일반 시민 약 10,000여 명은 "미군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대적인 가두시위에 돌입하였다.

평화적 가두 시위를 벌이는 비무장 시위 군중들에게 시위 진압 경찰의 발포로 사상자가 생기자 경찰의 만행에 분노한 대구 시민 15,000여 명은 다음 날인 10월 2일 아침까지 항의 시위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평화적 비폭력 항의 시위를 하는 비무장 시위 군중들에게 경찰은 또다시 총격을 가하여 수십명이 사망자가 발생하자 이에 분노한 대구 시민들은 경찰서를 습격하여 때려부수고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한 뒤 모든 파출소와 관공서를 공격 점거함으로써 대구시 전체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10월 2일 저녁 6시 대구지역 일원에 게엄령이 선포되고 탱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미군이 대구 시내에 진입하여 대대적인 진압작전에 나섰다.

그러나 민중들의 사무친 증오심은 순식간에 항쟁의 불길은 전국적으로 무섭게 번져 갔다.

이렇게 민중봉기가 짧은 시간에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미 군정의 탄압과 강제적 해체 시도에도 완강하게 버티고 남아 있었던 인민위원회의 지도하에 농민 대중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10월 3일에는 영천, 의성, 군위, 왜관, 선산, 포항, 영일 등지에서 각 지역별로 수 천에서 수 만 명 규모로 미 군정 통치기구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경상도 지역의 주요 지방 대부분이 봉기에 참여하였고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등 전국의 모든 지역으로 민중 봉기는 확산되었다. 10월 31일 전라도 화순탄광 노동자 5,000 여 명은 일제히 파업에 돌입하면서 이 중 3,000 여 명이 광주를 향해 도보 행진을 벌였다.

이에 발맞추어 전라도 지역의 전화 교환원들도 파업을 단행, 모든 통신을 마비시킴으로써 미군의 군사작전을 방해하고 병력 투입을 차단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미군을 포함하여 경찰, 국방경비대, 김두한 따위의 정치 깡패 등 온갖 탄압기구들을 총동원하여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진압 작전에 수많은 민중들이 살상을 당한채 12월말 경, 10월 대구 민중항쟁은 끝나고 말았다.


이렇게 약 3개월 동안 계속된 대구 민중항쟁은 미군과 그 하수인인 경찰, 국방경비대, 정치깡패 등에 의하여 1,500여명이 목숨을 잃었고 26,000여명이 심한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5,000여명이 체포 연행되었으며 체포된 민중의 가옥과 재산은 경찰과 정치깡패들의 손에 파괴되고 약탈되었고, 경찰서에 끌려간 뒤에는 혹독한 고문과 살인적인 폭력에 시달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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