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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Mar 12.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VI 충청 이유태 유허지

열하나. 이유태유허지

충남 공주시  상왕동 339-4.

옛날 계룡산 끝, 용의 꼬리에 해당하여 위는 넓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좁아 물의 흐름이 왕성하여 왕골이라 하였는 데, 여기가 왕골의 위쪽이라 상왕동.

문화재자료  제390호


이유태(1607~1684)

본관 경주.

사계 김장생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예학에 특히 이름이 높았다.

김집의 천거로 인조 때 공조·이조참의와 승지를 지냈으며,

효종이 즉위하자 송시열, 송준길 등과 북벌계획에 참여.

효종이 붕어하자 실패.

삼사가 김상헌을 탄핵하자 상소를 올려 처벌을 반대.

세상을 떠난 뒤 이조판서에 추증.

송준길, 송시열, 윤선거, 유계와 더불어 충청 오현. 현종이 22번이나 벼슬을 내렸지만 거부.

사헌부 대사헌도 거부.

57세 되던 1663년 이곳 중동골로 이거한다.

용문서원 건립하여 후학들 기른다. 소실.

1977년 중건.

동재 현판은 존성재. 存養省察)존양성찰에서 따왔다.

양심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하여 나쁜마음이 스며들지 않게 잘 살펴 단호히 물리쳐야 한다는 것.


1675년 이미 68세 초야에서 제2차 예송논쟁.

정권은 남인 손에 있고 영변으로 5년간 유배.

1680년 유배에서 풀려나자 용문서원 열고 후학 양성.

묘는 충남 연기군 남면 종촌리 산 324.

1번국도와 36호국도가 만나는 이 곳에는 호서유림의 거두인 초려 이유태선생의 묘역은 두 차례 역사의 칼날을 벗어났다.

일제강점기에 철도건설로 묘역 이장이 거론되다가 문중과 전국유림의 반발로 구간이 변경되었고,

1970년대 도로건설계획이 있었지만 같은 반대로 보호되어 오늘날까지 유지.

1883년 고종이 신도비 내리고.  

다시 세번째 칼날이.

세종시가 들어서는 것.

문중과 도지사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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