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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Mar 12.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V 전라 군산 근대건축 이영춘가옥

열셋. 근대건축의 보루…군산 마지막 07 이영춘가옥

현재 군산간호대 부지로 활용되고 있는 광활한 땅은 일본으로의 쌀 수탈을 도맡았던 농장을 소유 했던 일본인의 별장자리다.

일본의 대지주였던 구마모토 리헤이 熊本利平는 1903∼45년 군산 개정에 설치한 농장을 중심으로 1개 부(당시 군산시)와 5군(김제 정읍 등), 26개 면을 관장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었다.

당시 1200여만평에 달하는 광활한 대지를 소유하며 3000여 가구의 소작농을 부릴 정도였다.

일본인들은 은행에서 싼 이자로 대출을 받아 군산 농민들에 게 토지를 담보로 고리대금을 일삼았다.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한 결과, 군산 지역엔 일본인 농장 수십 개가 생겨났고.

일제강점기 전당포 영업은 발 빠르게 진화하게 된다.

근대적 산업구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조선의 경제구조 탓. 


이 작은 포구는 개항과 국치를 거치면서 인구 10만 명이 넘 는 무역항으로 거듭나게 된다.

일본은 조선강점 이후 쌀과 자원을 수탈해가는 창구로 군산을 선택했다.

군산 앞 바다는 미곡과 광물을 실어가는 일본 선박으로 항상 북적거렸다.

식민지 시절, 군산에는 쌀과 자원이 넘쳐났지만 조선 서민들은 풍요속 빈곤을 겪어야 했다.

대다수가 농토를 잃고 소작농과 부두 노동자로 궁핍한 삶을 이어갔던것이다.

일제 강점기 동양최대 농장주였던 구마모토 리헤이는 일본 나가사키 현의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しものせき시모노세키(下關) 상업학교와 けいお게이오대학 이재과에 다니던 중 (23세)에 청일전쟁 승리로 일본이 해외진출 장려 시절에 조선으로 건너와 끝없이 펼쳐진 옥구군일대 기행문을 まいにち마이니찌 신문에 기고 후 후원자들과 함께 1903년 농장를 설립한다.

당시 규모로는 큰 건물과 부대시설을 갖춘 농장과 50여명의 농림학교 출신 직원 배치했다.

거액의 자본을 들여 수리시설과 경지정리를 하고 미국포드 자동차회사 경영 이념대로 지장과 분장을 연결하는 피라미드 형태의 소작농 통제한다.

모던타임즈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1927년~1935년경까지 1,000만여평(여의도면적이 계산방식에따라 84~120만평인걸 감안한다면 10배정도)의 농지와 3,000 농가 20,000 여명의 소작농민들이 미곡 수확량 2배 이상 증가하는 실적를 거두게된다.

제초자금, 논갈이, 수차, 쟁기구입자금 비료 대금은 현금으로 회수하였고 상당한 이자를 붙였다고 알려진다.

60% 소작료가 징수 되었다고 하고.

구마모토가 봄·가을에 머물 자신의 별장으로 지은 이 집은 조선총독의 관사와 견주어질 만큼 공들여 지었다.

사방으로 출입문이 나 있는것과 일본식 아기자기한 정원을 만들지 않고 큰 나무들이 둘러싼 자연스런 정원을 가진 것이 특징이다.

실내에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듯 수집한 고종황제가 사용했던 의자와 침대가 놓여있다.

평면은 일식의 중복도형 평면을 바탕으로 양식의 응접실과 한식 온돌방이 결합된 절충적 구조고.

구마모토가 소작인들의 건강을 책임질 이영춘 박사를 1934년 초빙 해오면서 약속한 농촌보건위생연구소를 지어주지 못해 집과 의료장비 일체를 이박사에게 주었다.

당시 월급 150원은 일본인 고급의사 대우였다

(당시 쌀 두가마니에 10원이었으니, 지금으로 환산하면 쌀 30가마 쯤 됩니다)

이영춘 박사가 사용하면서 일식의 다다미방을 온돌방으로 개조한다.

가옥내의 기초와 벽난로는 호박돌을 허튼층쌓기 하였고 외벽의 하부는 통나무를 절반으로 켜서 걸침턱맞춤으로 짠 귀틀집의 구조다.

지름 15cm 되는 통나무를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쌓아 올려서 벽을 삼은 집이 귀틀집이다.

외벽의 상부는 회반죽 뿜칠로 마감하여 색채와 질감이 목재와 좋은 조화를 이룬다.

지붕은 요철이 있는 평면구조에 맞추어 박공과 모임지붕이 결합된 형태 위에 판석으로 마감했다.

이 집의 바닥은 Teak 쪽매널이 정교하게 짜여져 있으며 샹들리에 및 가구들은 외국에서 수입한 것들로 당시 건축비가 조선총독부의 관저와 비슷하게 소요되었다고 할 만큼 고급 자재를 사용하였다.

중복도를 중심으로 남쪽에 커다란 다다미방이 있고 북쪽에는 현재 식당으로 사용하는 온돌방이 있으며 복도 끝에 작은 홀이 있어 부엌과 다용도실, 화장실이 연결된다.

외부와 연결되는 북쪽 창은 유리를 낀 세살창과 미닫이 방충망, 완자창 등 3중의 창을 만들었으며 부엌은 현재 북쪽에 개수대를 설치하여 서서 행동하도록 된 부엌으로 개조하였다.

현재 이영춘가옥은 기념관으로 변신 하였다.

'쌍천 이영춘 박사 기념관' 조성을 앞두고 최근 유족들로 부터 가구 및 유품 213점, 서적 469권, 사진 199장 등 총 884 점의 유품을 기증받아 전시중이고.

서구식·일식·한옥의 양식이 결합된 이와 같은 사례는 도내의 주거 건축에서 그 사례를 볼 수 없으며 다른 도에서도 흔치않은 사례다.

이영춘가옥.

전북유형문화재 제200호

전북 군산시 개정동 413-11


李永春 이영춘(1903~1980)

본관은 평창,

호는 雙泉쌍천(두 줄기의 샘물; 육체적인 질병을 치료하는 샘물 또 하나는 영혼을 치유하는 샘물).

불쌍한 호남 지역 농민들에게 평생 흙에 사랑을 심으신, 쌍천 이영춘 박사님은 그의 일생이 순탄치만 하지 않았다.

결핵을 연구하면서 1936년 첫번째 부인 김순기여사와 첫딸에게 결핵을 옮겨 두 사람이 사망하게 되고.

1948년 두번째 부인 김순덕은 농촌위생병원 준공 후 과로사망하는 비운을 겪는다.

1949년 당시 평양신학교 출신 군산동부교회 김금련전도사와 세번째 결혼하여 슬하에 8남 6녀의 자녀를 두게 되는데 수의사, 목사, 선교사, 대학교수, 사회복지분야(모세스 영아원 운영) 성악가 등으로 다방면에서 아버지 유지를 따라서 봉사생활하고 막내딸 이계심목사는 몽골정부에 울라바트르 대학를 설립 (4년제 4,000명)를 기부하는 등 우리나라와 몽골이 국가간 수교하는데 큰 업적을 세웠다고 알려진다.

1980년 기관지 천식으로 별세하신 이영춘 박사님은 당신이 뭍힐 곳이 한평이 없을 정도로 개인은 무척 가난했다 한다.

1951년 개정간호학교 설립

1952년 화호여중 설립

1961년 화호여고 설립.

1957년 일심영아원 설립

1965년 군산에 일맥영아원 설립.


이상으로 군산 근대 건축 기행을 마무리한다.

이렇게 한바퀴 휘~익 돌아보는데 당일이면 충분하다.

시뮬레이션 해보니 오전 6시에 서울에서 출발하면 오후6시면 여유있게 귀경할 정도.

청년들을 위해 당일코스 인문기행을 만들고 있는데, 의외로 가능한 곳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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