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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Mar 14.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IV 서울 경복궁 2/4

열둘. 조선의 제1법궁 경복궁 2

조선의 제1法宮법궁, 경복궁 두번째이야기

; 눈여겨 보지 않는 재미진 요소들


경복궁에 오기위해선 차를 가져오면 광화문 오른쪽 주차장을 이용하고, 지하철일경우 왼쪽에서 진입하게된다.

이러면 보통 광화문을 보지 못하고 경복궁을 보게된다.

궁의 외곽정문을 지나야 매표소가 있으니.

그래 우선 매표소 밖 외부시설물을 살짝 이야기 해 보자면...

궁궐 진입은 궁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은 사정이 좀 달랐다.

獬豸해치상 안쪽지역으로 진입하는것만으로도 궁궐에 진입하는것과 같은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경복궁 중건 2년째되던 1870년 어느날, 고종은 광화문 앞에서 아무나 말타고 다니는 일이 없도록 사헌부에 규찰을 명한다.


대궐문에 해치를 세워 한계를 정하니, 이것이 곧 象魏상위다.

조정신하들이 그 안에서는 말을 탈 수 없게한 것은 임금이 타는 수레에 공경을 표하라는 뜻에서다.

조금전 출궁하다 보니, 從陞人종승인이 그 안에서 말을 타고 있던데 이것이 어찌 일의 이치와 체면과 도리에 맞겠는가?

전후에 걸쳐 단단히 타일러서 경계한 하교가 엄중했는데도 한갓 형식이 돼버렸으니 이같이 하고서 어찌 기강이 설 수 있겠는가?

지금부터는 사헌부는 규찰하여 글로써 보고 토록하라.

-고종실록 7년10월7일


象魏상위란 원래 궁궐 문밖에 법령을 높이 게시하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이 轉전하여 威儀위의 높은 궁궐, 또는 궁궐 문의 뜻으로 쓰였다.

고종이 광화문 해치상을 두고 상위라 했으니, 그것은 곧 해치상이 있는 곳에서부터 궁궐 권역이 시작됨을 말한 것이다.

광화문 해치상은 고종 당시에 명성이 높았던 석공 李世旭이세욱(혹은 태욱泰旭)의 작품이다.

외형을 살펴보면 온몸이 둥근비늘로 덮여 있고 큰눈과 주먹코, 입술사이로 드러난 앞니와 송곳니가 인상적이다.

네 다리에는 불꽃모양의 火焰脚화염각과 나선형 갈기가 선명하고, 정수리는 약간 불룩할 뿐 뿔은 보이지 않는다.

혹자는 이 때문에 해치가 아니라 주장하기도 한다.

각종 고전 속에 나타난 해치의 성격에 관한 공통된 내용은 법과 정의를 수호하는 신수라는 것이다.

상상의 동물인 해치는 날카로운 판단력과 예지의 능력을 갖추고 있어 사람의 언행만 보고도 그의 성품과 됨됨이를 파악해 낸다.

사람들간에 분규나 충돌이 있을때 능히 시비곡직을 가려 내는데, 이치에 맞지 않는자는 정수리에 난 외뿔로 받아 징벌하고, 극악무도한 죄인은 죽여 먹 기까지 한다고 한다.

해치가 법과 정의와 관련된 신수라는 것은 한자 法법의 옛 글자인 灋법자에서도 나타난다.


灋자廌치와 法법두 자를 엮어 만든 글자로, 여기서 廌치는 해치의 다른 이름이다.

廌자는 해치가 법과 관련이 있고, 法은 해치에 의해 상징된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준다.

항상 해치와 함께 거론되는 인물이 순임금 시대의 법관을 지낸 皐陶고요다.

그는 순임금을 도와 나라 안팎의 오랑캐를 물리쳐 백성을 지켜 편안한 생활을 누리게 했고, 또한 해치와 함께 죄의 유무와 경중을 현명하게 판단하여 정의국가 건설에 큰 공헌을 했다.

후세 관료들은 그를 귀감으로 삼았는데, 특히 조선시대 법관들이 해치를 수놓은 법복을 입고 정사를 살폈던것도 해치와 고요의 법 정신을 본받으려는 데 뜻이 있었다.


광화문광장에서 오른쪽(안국동 방향) 모서리에 거무튀튀한 건물있다.

東十字閣동십자각은 사적 제117호 경복궁에 포함되어 있는데,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3호였다가 사적 제117호로 합해졌다.

동십자각은 경복궁의 망루다.

경복궁은 이 망루 덕에 궁궐이 되는 것이다.

다른 4개의 왕궁은 그냥 왕궁이고 두개의 망루를 갖춘 경복궁은 한양의 유일한 궁궐이다.

위대한 유산이지만... 서십자각은 1926년 일본이 전차 선로 깔면서 철거했다.

동십자각 우측으로 보이는 건물은 김수근의 명품 1965년 작 한국일보 사옥은 2007년 폭파되고 조병수 작품 트윈트리 타워가 대신 들어 섰다.

그 다음으로 光化門광화문.

앞글에서 처럼 이름이 바뀌었다.

1399년 광화문 창건 당시 원래 이름은 오문午門이었다.

즉, 12지중 남쪽을 가리키는 午를 사용 했다가 정도전이 四正門사정문(사방에서 어진 이가 오가는 정문)으로 명명한다.

이를 1425년 세종때에 이르러 집현전 학사들에의해 지금의 이름인 광화光化를 얻게된다.

의미는 書經서경에 나오는 이야기다.


光被四表 化及萬方 광피사표 화급만방

 ; 빛이 사방을 덮고 감화가 사방에 미친다

敬天愛民경천애민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

1865년 중건.

1927년 왜놈들이 지금의 국립 민속박물관 앞으로 이건했던것이 6.25 전쟁 때 소실된다.

1968년 박통이 콘크리트로 대충 복원하는데 동남 방향으로 6도 틀어지고 뒤로 14.5m 물러 앉았고.

1968년 12월 콘크리트 광화문을 지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당시 쓴 친필 현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듬해 3월 자신이 새로 쓴 현판 글씨를 바꿔 걸었다.

2005년 정치권 공방으로까지 번졌던 광화문 현판 교체 논란이 옛 현판 복원으로 일단락을 짓게 된다.


기존 한글 현판 대신 19세기 말 경복궁 중건 당시 무관 임태영이 썼던 해서체 현판 글씨를 디지털 복원한다


2010년 광화문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가로 4.2m, 세로 1.35m인 광화문 현판의 복원은 이제 나무 현판에 글씨를 새기고 배경색을 칠하는 雙鉤模本쌍구모본방식으로 그려서 달았다.

그런데, 너무 서둘렀다.

치적, 업적...뭐 이런 정치쇼로 그 해 광복절에 맞추다보니 덜 건조된 육송을 사용해 3달만에 터졌다.

2007년 광화문 해체 공사를 하면서 내려온 박통의 현판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중이다.

홍예문이 3개중 가운데 좀 큰 문은 왕만 다니는 문이고 좌우는 신하들이 오간다.

임금의 명령과 교지는 반드시 광화문을 통해서 나가고 현명한 선비들도 다 광화문을 통해 드나 들었다.

바른 정치가 드나드는 문이다.

지금은 옆구리로 드나들고...

티켓 발권하고 이제 홍례문을 지나면 근정문 가기전에 자그마한 석교를 건너게 된다.

영제교는 홍례문이 철거될 당시 수정전 앞 빈터에 방치 되었다가 1970년대에 들어와서 근정전 동쪽으로 옮겼고 2000년대 중반 홍례문 권역 복원사업을 할때 현재의 위치로 돌아 왔다.

경복궁 뿐 아니라 창덕궁 금천교, 창경궁 옥천교, 덕수궁 금천교등 모든 궁궐에는 명당수가 흐르고 御溝어구가 있고 그 위에 석교가 있다.

덕수궁의 경우에는 그곳이 원래 궁궐이 아니라 성종때 월산대군의 사저였기때문에 명당수는 고려되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궁궐의 성격과 기능을 가지게 되면서 초입에 어구와석교가 설치되었다.

이것은 당시 궁궐 조영에 명당수가 매우 중요한 풍수조건중 하나인을 알게 해 주는 사례다.

영제교가 있는 어구의 맑은 물은 경복궁을 창건할 당시 명당수 개념을 적용하여 인위적으로 끌어들인것이다.

북악산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흘러 내리는 물을 경회루 서쪽으로 유도한 후 영추문을 조금 지난 지점에서 동쪽으로 흐르도록 물길을 잡았다.

여기부터 西流東入서류동입(명당수는 서쪽에서 흘러들어와 동쪽으로 들어가야 좋음)의 형국을 갖춘 명당수가 근정문 앞 영제교 밑을 지나 동쪽 행각 밖으로 흘러 가다가 남남동으로 방향을 바꾸어 궐 밖으로 뻐져나가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북玄武에서 발원한 물이 外堂외당을 돌아 동쪽으로 흘러 돌아가면 극히 길하다고하는 풍수적 믿음의 소산이다.


陽宅양택을 상서롭고 복되게 유지하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처음부터 완벽한 명당을 찾아 그 곳에 집을 짓는것이고 또 하나는 현재의 터가 지닌 풍수적 결함을 보완하여 길지로 만드는 것이다

(이건 한옥 연재 마지막에 산림경제에서 예를들어 기술했던 裨補비보의 철학에 올려져 있다)

근정전에서 어전의 공식 행사가 있을때면 문무백관들은 입장하기에 앞서 영제교 남단에서 형식을 갖추고 대기한다.

시간이되면 백관들은 廷吏정리의 안내를 받아 근정문을 통하여 법전 마당으로 들어가게 된다.

영제교는 법전이라는 지엄한 공간과 일상의 공간을 연결해 주는 통로로서의 상징적 의미를 갖게되는것이다.


영제교 네 모퉁이를 보면 온 몸이 비늘로 덮여 있고 머리에 삼지창 같은 뿔을 가진 동물석상이 있는데 네마리 모두 포복자세로 어구 바닥을 주시하고 있다.

이걸 자세히 보신분은 별로 없을텐데...

물길을 타고 들어 올지 모름는 악귀를 물리치기 위한 배려인것이다.

석수와 관련된 몇가지 기록이 전해지는데

먼저 임진왜란 때 종군한 일본인 승려 釋是琢석시탁의 朝鮮日記조선일기 중 기록이 있다.


橋之左右安置石獅子四匹而令護橋

다리(영제교) 좌우에 석사자 네 마리를 안치하여 다리를 호위케 했다라


또 한 이글에는 설명을 적어 놓았다.


중앙에 깍은 돌로 여덟자의 御道어도를 마련하고

석사자를 艮巽乾坤간손건곤 모두 서리에 두었는데 모두 열여섯마리다


그가 사자라고 말한 동물은 지금 우리가 영제교 사방에서 볼 수 있는 석수임에는 틀림이 없다.

형상을 보면 모두 목에서 발목까지 비늘로 덮여 있고 빗으로 빗은듯한 갈기머리에 삼지창처럼 생긴 뿔이 나 있다.

앞서 석시탁은 이 동물을 사자라고 했으나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닐것이다.

상상의 동물인 狻猊산예를 사자로 잘못보고 말했다 하더라도 사자나 산예모두 몸이 비늘로 덮여 있지도 않고 정수리에 뿔도 없기 때문에 무슨 이유에서 사자라고 한것인지 알 도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동물의 진짜이름이 뭘까......

조선후기의 학자 李德懋이덕무가 남긴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이 신수의 정체가 밝혀진다.


경복궁 어구 곁에 누운 石獸석수가 있다.

얼굴은 새끼사자 비슷한데 이마에 뿔이 하나있고 온몸이 비늘에 덮여 있다.

새끼사자인가하면 뿔과 비늘이 있고, 기린인가하면 비늘이 있는데다 발이 호랑이 같아서 이름을 알 수가 없다.

나중에 상고해 보니, 중국 하남성 남양현 북쪽에 있는 宗資종자의 碑비 곁에 두 마리의 석수가 있는데, 그 짐승 어깨에 하나는 天禄천록이라 글이 새겨져 있고, 다른 하나는 僻邪벽사라 글이 새겨져 있다.

뿔과 갈기가 있으며 손바닥만한 큰 비늘이 있으니 바로 이 짐승이 아닌가 싶다.

... 남별궁에도 이런 짐승 하나가 있는데 바로 경복궁에서 옮겨온것이다.

- 청장관전서, 이목구심서4


御溝流水碧於苔 辟邪天禄相對跪

어구에 흐르는 물이끼끼어 푸르고 벽사 천록이 마주 꿇어 앉아 있네

 - 한양풍물/이덕무 박지원


이로써 영제교 사방의 짐승이 천록임을 알 수 있다.

天禄천록은 天鹿천록이라고도 하는데 後漢書 靈宰紀 후한서 영재기에서 관련 기사를 찾아 볼 수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왕궁을 수리할때 동인과 황종을 각각 4개, 그리고 천록과 두꺼바를 구리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주에 후한때 종자라는 사람의 무덤 앞에 2개의 석수가 있었는데 뿔 하나를 가진것이 천록이고 둘을 가진것이 벽사라 한다고 했다.

청나라때에는 천록이 삼품관의 묘비에 장식되기도 했고.

현재 영제교 주변의 네 마리 천록 중에 남동쪽 모서리 부근에 있는것의 등 부분에 제법 큰 상처가 나 있다.

이것의 원래 자리는 다리 북서쪽 모서리 부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과 남서쪽 모서리에 있는것이 서로 위치가 바뀌어 있다.

그 근거는 정조때 유득공의 아들 수헌거사가 지은 경복궁유관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다음날 경복궁 남문 안으로 들어갔다.

남문(광화문) 안쪽에 다리가 있는데, 다리의 동쪽에 천록 두 마리가 있고 다리 서쪽에 한 마리가 있다.

비늘과 갈기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완연하게 잘 조각되어 있다.

남별궁 뒤뜰에 등에 구멍이 파인 천록이 있는데, 이와 똑같이 닮았다.

그런 관례가 없음에 비추어 필시 다리 서쪽에서 옮겨온 것이 틀림없다


이 글의 내용으로 보면, 수헌거사가 영제교를 찾았을 때는 서수가 세 마리만 있었던 것 같다.  

4개의 천록 중 서쪽에 있던 것 중 하나가 남별궁으로 옮겨진것을 보여주고 있다.

북동쪽에 있는 놈을 보면 등에 제법 큰 구멍이 나 있는데, 수헌거사가 남별궁에서 보았다는 바로 그놈 일 가능성이 크다.

지금은 누가 그 구멍을 땜질해 놓았으나 기술이 어설퍼서 구멍의 흔적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하였다.

남별궁이란 서울 남쪽 지금의 회현동에 있었던 별궁으로, 당시에는 칙사를 접대하는 장소로 쓰였던 곳이다.

세속에 전하기를 남별궁은 태종조 駙馬부마 조대임의 집이라고 하고, 청나라 이여송이 조선에 왔을 때 잠시 머물었던 소공주댁이라고 했다.

(이 이야기는 웨스틴조선과 황궁우관련해 )실어 놓았다)


천록의 위치 이동을 정리 해 보면...


네 마리의 석천록은 태조가 경복궁을 창건 할때부터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그 중 한마리가 남별궁에 옮겨지고 세마리만 다리 모서리를 지키고 있었고.

남별궁의 석천록은 원인을 알 수 없으나 등 부분이 깨져 있었다.

경복궁 중건시에 남별궁에 잇던것을 다시 옮겨와 파손된 부분을 보수하여 옛 자리에 두었다.

일제강점기에 훼철되어 수정전 앞에 방치되었던것을 해방 후 근정전 동쪽으로 옮겨 배치 할때 북서의 천록과 남동의 천록의 위치가 바뀌었다.

그때 잘못된 것이 홍례문 안에 영제교를 복원할 때도 수정되지 않았던것이다.


위치 문제는 그렇다 치고 재밌는 사실이 있다.

나중에 경복궁에 가시면 한번 확인해 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영제교 주변의 천록 중에서 흥미를 끄는것은 혓바닥을 길게 내밀고 있는 놈이다.

이 모습은 조선석공의 해학정신이 만들어낸 것으로 보기보다는 천록의 도상적 특징을 성실히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천록과 같은 종류의 신수인 벽사의 도상적 특징 중 하나가 혀를 길게 내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온몸이 물고기비늘로 덮여있는 천록도 용이나 봉황과 마찬가지로 여러 동물의 신체일부를 본뜨고 조합해서 만든 상상의 동물이다.

비늘을 가진 물고기는 이상할것이 없으나 온몸이 비늘에 덮인 짐승은 기괴한 느낌을 준다.

옛사람들은 사람이 괴상한 짐승을 보고 공포감을 느끼는것처럼, 邪鬼사귀도 그러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궁궐을 설계한 사람들이 영제교 주변에 천록을 배치한 것은 외부에서 침입한 사귀가 천록을 보고 놀라 달아나게해서 내부 공간을 상서로운 공간으로 유지하려는 묘책이었던 것이다.


다음에 이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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