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것의 제주 이야기 II 가슴 아픈 제주, 추사

그 아련함과 살아감 둘, 추사적거지

by Architect Y

2010년 75억 투입 추사관 개관.

설계자는 승효상.

입찰 대상이지만 문화재청장의 권한으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지명.

추사 김정희가 제주유배 시절 그린 걸작 ‘세한도(국보 180호)’의 건물 을 본떠 형식에 얽매지 않되 그의 정신을 투영하고 장식요소와 기교는 절제해 디자인.

동네 어른들은 창고같다고 불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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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고 줄곧 말해지 는 추사 김정희 추사는 대정향교의 기숙사인 동재에 「疑問堂의문당」이라는 현판 글씨를 써주었다.

공부나 인생이나 매한가지 의문을 던지는데서 부터 시작된다.


내 70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으니 당신도 그렇게 노력하시오


영조의 사위였던 김한신이 39살에 요절을 하자 큰형의 셋째 아들 김이 주가 제사를 모신다.

김이주의 큰아들 김노영 또한 아들이 없자 넷째 김노경의 아들인 추사가 4살에 김노영 앞으로 입양되고.

큰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연이은 사망으로 12세에 추사는 가문의 주인.

이 때문에 집안에서는 결혼을 서두르니 그의 나이 15세였다.

다음해에는 어머니가 혼례를 올린 지 5년 만에는 백년해로의 약속을 깨고 아내마저 세상을 버린다.

이어 스승 박제가도 눈을 감고.

시인 서정주는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라고 했다.

추사를 키운 건 8할이 죽음.


추사는 경전과 예술 문장이 조선에서 가장 뛰어나다.- 옹방강

우리 모두에게 각자 다른 지문이 있듯이 모든 땅도 고유한 무늬를 가 지고 있다.-승효상


1840년 안동 김씨는 병조판서 추사가 눈의 가시라 10년 전 윤상도의 상소문을 추사가 초안한 걸로 꾸미고 고향집에서 자고 있던 추사도 의금부로 압송되어 상소문 썼다는 죄목으로 사형당한다.

우의정 조인영이 말린다. 적당히... 제주도 유배.

1840년 9월 27일 제주도 가는 배 탄다.

1844년 그 유명한 세한도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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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추워진 이후에야 송백이 홀로 시들지 않음을 안다


차가운 세월을 그린다.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며 답례로 그려 준다.

한 채의 집을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주위 를 텅 빈 여백으로 처리해 극도의 절제와 간략함을 보여준다.

온갖 인위적인 기술과 허식적인 기교주의를 거부하고 극도의 절제와 생략을 표현한 명작.

1848년 9년 만에 제주도에서 돌아오지만 1851년 또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 간다.

이제 현실에 안나간다.

추사는 청계산 옥녀봉 일대에 부친의 묏자리를 잡고 그 아래 경치 좋은 곳에 별장인 과지초당에 칩거한다.

추사 김정희가 말년을 보낸 서울 봉은사에는 그의 절필이 된 「판전( 板殿)」이라는 두 글자가 남아있다.


七十老果病中作칠십노과병중작


일흔한 살 과천노인이 병중에 쓰다이라는 낙관을 보면 그의 몰 년에 쓴 것이고 일설에는 이 글을 쓴지 사흘 뒤 세상을 떠났다고도 한다.

그 고졸한 글씨는 진실로 대교약졸의 극치다.

학문으로서도 중국과 일본에까지 명성을 떨쳤던 조선조 최고 명필의 이 최고 명작은 죽음을 앞둔 최고의 경지에 올랐을 때 일견 유치해 보 이는 童子體동자체(어린이 글씨체)로 돌아가 있었다.

경성제국대학 사학과 교수를 지내면서 추사 연구에 몰두했던 일본인 후지즈카 지카시가 중국 베이징의 한 골동상으로부터 세한도 사들여 일본으로 도망.

전남 진도 출신의 갑부이면서 고미술품 소장가였던 손재형이 일본으 로 후지즈카를 찾아가 그림을 넘겨달라고 간청한다.

「이 그림엔 조선 선비의 정신이 배어 있습니다. 그래 일본에 있어야 할 물건이 아닌 거지요.」

손재형의 삼고초려에 항복.

「당신의 열성에 내가 졌소. 가져가시오.」

손재형이 세한도를 갖고 귀국한 얼마 후 후지즈카의 집은 폭격 맞는다.

정치에 투신해 재산을 탕진한 손재형은 그림을 고리대금업자에게 넘 기고 돈을 갚을 길이 막연해지자 소유권 포기하자 이를 개성 갑부 손세기가 사들인다.

지금은 그의 아들 손창근이 소장하다 세한도를 이 추사관에 기부한다.

명예관장인 유홍준은 '추사 간독첩', 간찰인 '제주목사 장인식에게' 등 추사유물 17점 기증.

「추사라는 거봉은 우러러보자니 아득하고 오르자니 막막하기만 한 신비로운 천인절벽이다」

추사라는 산에 오르려면 서예의 세 가지 정신을 이해해야 한다.


1. 우아한 인품과 정신을 먼저 갖추라는 淸高古雅청고고아

2. 글자와 그림에 깊은 학문과 인품의 향기가 배어 있어야 한다는 文字香書卷氣문자향서권기.

3. 글씨의 획과 형태가 남다르게 특이하고 기이하며 걸림 없이 자유롭 다는 奇崛奔放기굴분방.


승효상이 설계한 자택 이름은 수졸당.

재주가 많이 튀어나면 세상의 공격을 받을 테니 재주를 감추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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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巧若拙대교약졸

아주 교묘한 재주를 가진 사람은 그 재주를 자랑하지 않으므로 도리어 서툰 것처럼 보임의 의미로 졸을 지키겠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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