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것의 제주 이야기 II 가슴 아픈 제주 4.3

그 아련함과 살아감 셋 43기념관과 너븐숭이 기념관

by Architect Y

제주를 여행한다면 들러야할 곳이 43평화공원과 너븐숭이 기념관이다.

웃고 떠들고 즐기는거야 언제든 가능하지만 진심으로 육지것들이 제주분들을 바라보려면 들러야 하는 곳.

너븐숭이기념관은 제주4.3평화기념관과 더불어 잔혹한 참상이 벌어졌던 역사적 장소나 재난, 재해 현장을 돌아보는 여행인 Dark Tourism 다크 투어리즘의 대표적 관광지다.



1998년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좌파정권 등장.

김대중 정부는 2000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


죽은 사람은 있는데 죽인 사람은 없다.


2003년 진상규명위는 4.3사건 55년 만에 정부차원의 <진상보고서> 채택.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연계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 가 있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하게 주민들이 희생됐다. 인명 피해는 3만여 명으로 추정.


2003년 3월까지 정부에 4.3 관련자로 접수된 사람은 1만 4천 28명 이며 이중 2천 778명을 처음으로 4.3 희생자로 지정하고 같은해 10월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 4.3사건과 관련해 사건 발생 후 처 음으로 국가 차원의 잘못 공식 사과한다.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눈물바다.


제주도민에게 노무현은 은인이다.

보수우익단체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사과한 것은 위헌이라며 2004년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소송>제기하지만 당연히 각하된다.

이 친구들이 보기에 4.3평화공원은 폭도공원이다.


국비 380억 제주도청 도착.

현상설계.

희림건축, 조성룡, 승효상, 정기용 탈락.

당선작 공간건축.


꼭 모양이 팽이 같기도 하고 한라산을 뒤집어 놓은 거 같음.

제주시 봉개동 산 53-5 12만평에 제주 4.3 평화공원 조성.

희생자 전원의 위폐 모시고.

2008년 한라산을 뒤집어 놓은 거 같은 4.3평화 기념관 개관.

국비 20억, 도비 5억 도합 25억으로 운영.

당초 정부는 400억원 출연을 약속했으나 국가 재정운영상 일시 출연이 어렵다며 매년 20억원만 재단 사업비로 지원하는 거다.

1관은 역사의 동굴.

2관은 흔들리는 섬.

3관은 바람 타는 섬.

4관은 불타는 섬.

5관은 흐르는 섬.

6관은 새로운 시작.

특별전시관 다랑쉬굴 순으로 관람.

2009년 희생자 1만3546명 전원에 대한 각명비 건립.

각명비에는 희생자들의 이름과 성별, 당시 연령, 사망일시, 장소 등을 새겼다.


탁라는

662년 신라의 속국이 되기 전까지는 독립국가.

925년 독립.

1105년 다시 고려의 속국.

1273년 삼별초의 난 이후는 원나라 속국.

1367년 다시 고려 속국.

조선시대에는 유배지로나 사용하는 척박한 섬.

제주도 사람들이 대한민국 사람 싫어하는게 당연하다.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제주도에 일본군 6만여 명 주둔.

종전 직후 일본군이 철수하자 외지에 나가있던 제주인 6만여 명 귀환.


1945년 광복.

정부는 제주도까지 돌볼 여력이 없고 제주도의 뜻있는 젊은이들이 삼지창 들고 일본군 무장해제에 들어갔다.

제주도는 정부의 도움 없이 자율적인 해방을 맞는 거다.

1947년 제주도는 일본과의 교역금지로 최악의 경제상황.

전염병은 돌고 육지에서 건너온 일제경찰은 설치고 미군정의 잘못된 미곡 수입 정책으로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부정부패.…

1947년 제주북초등학교에서 3만여 명이 28주기 3·1절 기념식을 거행 하고 학교 앞에 있는 관덕정까지 평화시위한다.

시위대가 모두 해산하고 구경꾼들만 남았을 때, 기마 경관이 관덕정 앞을 지나가다 자신의 말에 어린이가 깔렸음에도 이를 그대로 방치한 채 지나갔다.

이에 분노한 군중이 욕하며 돌팔매.

제주읍 관덕정 마당에서 3.1절 기념집회에 참석한 시위 군중을 향해 경찰이 총을 쏴 6명을 죽인다.

3월 5일 '제주도 3·1사건대책 남로당 투쟁위원회'가 결성되어 제주도청을 시발로 총파업을 하지만 이는 좌익세력에게 빌미를 준거다.

3월 7일 미군정은 계엄령 선포.

3월 10일 제주도청을 포함한 민간 기업들 총파업. 정부는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낙인.

3월 14일 극우반공청년단체를 파견해 파업 주도 세력 2,500명을 검거하고 고문. 이제 제주도민 전체가 들고 일어난다.

이에 미군정은 8.15를 기해 다시 도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단행. 모두 투옥.

도민 지도자들 한라산으로 입산. 마침내,

1948년 4월 3일 자정 무장항쟁 시작.

제주 도민의 무장전위대인 자위대 5백 명과 그 동조자 1천명 경찰서 공격.

미군정은 9연대에 진압작전 출동 명령.

4월 28일 제9연대장 김익렬과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이 대좌하여 72시 간 내 전투중지에 합의.

미 군정장관 딘(W. Dean)은 평화협상 거부.

9연대장 김익렬을 해임하고 박진경을 기용해 강경 작전 준비.

1988년 김익렬은 이런 육필 원고를 남기고 세상을 하직한다.

나는 제주도 4·3사건을 미군정의 감독 부족과 실정으로 인해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의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이 최후에 들고 일어난 민중폭동이라고 본다.

당시 제주도 경찰감찰청장이나 제주군정장관, 경무부장 조병옥씨나 미군정장관 딘 장군 중에 한 사람이라도 사건을 옳게 파악하고 초기에 현명하게 처리하였더라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단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었던 사건이라고 확신한다.

당연히 잘리고.


5·5 최고수뇌회의 참석차 제주에 온 수뇌부들. 좌측에서 두번째 군정장관 딘 소장,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조병옥 경무부장, 맨 오른쪽이 김익렬 연대장

11월 군경토벌대가 조천면 교래리 주민 30명을 총살하는 것을 시작으로 중산간 마을에 대해 초토화 작전 전개.

1949년 3윌 12일 총공격.

한 달 동안 1,608명의 민간인 살해.

박진경 연대장은 부하에게 암살당하고. 미군정 열 받았다.

사람 뿐 아니라 집, 논, 밭 다 불 지르는 거다.

3개월 동안 2만여 명 사살.

160여 개의 마을, 1만 5천여채 가구 소실되었으며 제주도 전체 인구의 35%나 되는 이재민 발생됐다. 제주도민은 지금도 대한민국 사람 싫어한다.

1949년 6월 총책 이덕구의 사살로 진압작전 완료.

이제 끝났나?

아니다.

연이어 한국동란.

어느날 보니 동네에 빨간 깃발이 걸린다. 다시 어느날 보니 태극기가 내 걸리고. 어느날 모든 주민은 마을 공터로 다 끌려 나간다.

순경은 장총을 들고 이렇게 말했다.

살아 있는 사람은 다 나와. 갓난아기를 들쳐 업은 산모가 애처롭다. 단지 일어섰다는 이유만으로 순경은 장총 발사. 이 한 많은 세상에 나온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아기의 머리가 터지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있던 4.3사건 관련자 즉결처형.

3천여 명 사살.

전쟁도 끝나고.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 전면 개방.

4.3사건은 이렇게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리고.

사망자는 제주도민 24 만 중 3만 여명.

4.3사건 관련자는 1981년 까지 연좌제로 철통 감시.

1960년 5월 국회 차원에서 거창ㆍ함양 등지의 양민학살사건에 관한 조사단이 구성되자, 제주 출신 국회의원들의 발의로 제주 4ㆍ3의 진상 도 조사하여야 한다는 문제가 제기.

6월 6일 하루 동안 진상조사.

1961년 5.16 군사혁명. 다시 조용.

1979년 현기영이 4.3사건을 고발하는 <순이 삼촌> 발간. 다친다.

서울사대부고에 출근한 현기영은 수업 중 중부경찰서로 연행. 며칠 뒤 현기영은 합동수사본부 요원에게 인계돼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2박3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첫날은 몽둥이로 전신을 난타 당하고 이튿날은 그 멍들고 부은 몸뚱이 위 군복을 벗기고서 내복 위로 싸릿대 가지를 후려치면서 내 몸 마디마디를 자근자근 후려갈겼다.

싸릿대로 손등을 맞기도 했는데 손톱이 터져 끈끈한 피가 엉겨 붙기도 했다.

셋째 날은 어느 방에 불려가 다수의 수사요원들로부터 무지막지한 구둣발 세례를 받아야 했다.

이렇다 할 꼬투리를 잡아내지 못한 채 다시 남부경찰서로 인계된 현기영은 집시법 위반죄로 20일간 유치장에서 머문 뒤 풀려나고.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운동.

현기영은 또다시 학교 수업 중 경찰서의 대공과로 연행돼 갔다.

4박5일에 걸친 수사관들의 집요한 신문 공세는 계속되고 순이 삼촌은 판매금지 된다.

당시 금서는 600여 종으로 금서에 오르면 곧 베스트셀러 오르는 거다.

1990년 해금되자 <순이 삼촌>은 60만 권 팔려 나간다. 펜의 힘.

1992년 다랑쉬 굴에서 유골 발굴.

1948년 12월 18일 다랑쉬굴에 피 신해 있던 민간인 11명이 군·경 합동 토벌대가 굴입구에 지핀 불의 연기에 질식해 참혹하게 숨진 거다.

희생자는 9세의 어린이와 부녀자 3명, 성인남자 7명. 유해가 공개되자 정부는 서둘러 유골을 화장해 버리고 굴 입구는 포크 레인을 동원해 봉쇄해 버렸고.


아쉬움이 남는건 정치적인 대립으로 위령제가 퇴색 되고, 정권이 다시 들어줬던 손을 슬그머니 내린다는거다.


깊은 이야기...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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