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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Mar 21.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VI 충청 무령왕릉

열셋. 무령왕릉

도로를 개설하려다가 이 산의 어깨쯤에서 토기와 독특한 건물의 흔적이 발견됐다.

제사를 지내던 유적지.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묘지석에는 무령왕이 죽은 지 2년 뒤에 안장됐고, 무령왕비가 사망한 지 3년 뒤에 합장한 것으로 나와 있다.

사망 후 안장되기까지 2~3년의 빈 시간을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정지산의 유적 발굴이 그 질문에 해답을 줬다.

왕과 왕비의 시신을 2년여 동안 이곳에 안치하고 제사를 지냈을 것이란 게 고고학자들의 추론이다.


정지산.

큰 배가 멈춰 있는 모양의 산.

정지산은 526년 11월 32살에 요절한 왕비를 모신 빈전.

기와건물 한 가운데 왕비의 시신을 모셔두고 27개월 동안 문상을 받았다.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 옆 건물에는 얼음창고인 빙고가 있었고.

금강이 내려다 보이는 명당.

주소 충남 공주시 금성동 산 1.  사적 제474호


백제를 창건한 왕은 온조왕이고 마지막 왕은 의자왕이다. 백제의 왕은 모두 31명이다.

무령왕은 제 25대 왕.

1996년 이 유적지 내에서 8잎의 연꽃잎이 새겨진 수막새가 발견됐다.

수막새는 기왓골 끝에 사용되었던 기와.

8잎의 연꽃잎은 국가적인 중요시설에 사용되던 장식.

1971년 송산리에서 배수로 작업을 하던 인부들이 벽돌무덤 발견.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묘비 발견.

영동대장군은 중국 양나라로 부터 받은 직책이다.

백제 무덤은 돌무지무덤에서 굴식돌방무덤으로 변해 갔는데, 무령왕릉은 벽돌을 쌓아 무덤방을 만든 특이한 무덤.

무령왕의 전 임금인 동성왕은 501년에 신하인 백가에 의해 살해당했고.

이때 무령왕의 나이는 40세였는데, 그는 동성왕을 이어 왕위에 올라 백가의 반란을 진압하여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담로(지방의 주요 지역 22곳에 왕족이나 충성스런 신하를 파견하여 다스리게 한 제도) 제도를 시행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27개월 빈전 기간 동안 국내외 문상객들로 바글바글.

중국과 일본도 부장물품을 보내왔고.

매장일에 빈전의 왕 목관이 미리 축조된 벽돌 왕릉으로 옮겨졌다.

국내외 부장품들도 함께 왕릉에 반입되었고 의례를 치르고 입구는 벽돌로 폐쇄.

526년에 죽은 왕비도 같은 과정을 거쳐 왕 옆에 묻혔고.

이게 무령왕릉이다.

공주 송산리는 송씨네 산. 지명을 따라서 송씨네 산이라는 뜻으로 이곳이 송산리가 된 것.

발견 당시 무령왕릉은 도굴되지 않은 처녀 고분.

유일하다.

목책에 둘러싸인 품品자형의 건물 배치는 국내 초유의 발견.  

1971년 7월8일 무령왕릉의 유물들을 안전을 이유로 하룻밤새 몽땅 들어내버린 발굴 참사로 유명하다. 사상 처음 무덤 주인의 실체가 확실한 백제 왕릉이 온전하게 발견되자 전문가들은 물론 전국에서 사람들이 떼로 몰려들었다.

빨리 무덤 속을 보여달라는 아우성에 기가 질린 당시 국립박물관장 김원룡은 인근 여관에서 대책회의를 연 끝에 벼락치기 반출이라는 결정을 내린다.

4명이 두 조로 나눠 밤샘하며 8시간 만에 유물 수천점을 실어냈다.  


무령왕릉에 대한 나의 실수는 비단 나 자신만의 아쉬움에 그친 것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에 대해 큰 죄가 되고 말았다.

- 김원룡

1997년 원형 보존을 위해 무령왕릉 영구 폐쇄.

2003년 64억 투입해 무령왕릉 모형관 개관.

무령왕릉 안으로 죽 올라가면 입간판 나오고, 수백m만 오솔길 따라가면 <정지산 유적> 나온다.

그렇지만 무령왕릉을 찾은 관람객 중 정지산을 찾는 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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