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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Mar 22.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IV 서울 창덕궁 1/2

열다섯. 실질적 법궁, 昌德宮창덕궁 1/2

자연과 조화 가장 한국적인 궁궐, 昌德宮창덕궁 첫번째이야기


조선(과거)의 사상과 이념은 역사책에만 있지 않다.

그 가치를 실현하려는 공간인 궁궐(고건축)에 좀더 본질적으로 담겨 있다.

집(궁궐)터 잡기부터 건축물(전각) 하나하나의 이름과 모양, 쓰임새, 공간구조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상)의 이상을 심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건축(궁궐)은 가장 밀도높은 인문의 현장이 되는것이지다.

중국문헌 <釋名석명>에 의하면

宮궁은 穹궁이다


穹궁은 「담 위로 우뚝 솟은 집」이라는 뜻으로 나라안에서 가장 높은사람이 사는 집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궁궐은 왕과 신하가 정무를 보고 거처하는 宮궁과 그 궁을 지키는 궁성, 성루, 성문을 가리키는 闕궐이 합쳐진 말이다.


창덕궁昌德宮 창건.

덕이 넘쳐나는 큰 집.

제1법궁인 경복궁은 13만평.

이궁인 창덕궁은 17만5천평.

처음에는 법궁인 경복궁에 이어 이궁으로 창건했지만 이후 임금들이 주로 창덕궁에 거주하면서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하였다.


태종이 새로운 궁궐을 세운 까닭은 무엇일까요?

태종은 경복궁의 형세가 좋지않기때문이라고 했으나 실질적인 이유는 다른데 있었던것 같다.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정적 정도전과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으로서는 그 피의 현장인 경복궁에 기거하는 것이 꺼려졌을 것이다.

창덕궁이 세워짐으로써 조선왕조의 궁궐체제는 法宮법궁-離宮이궁의 양궐 체제가 된것이다.

임진왜란 때 한양의 궁궐들이 모두 불탄 후에 경복궁은 그 터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재건되지 않았고 1610년(광해2)에 창덕궁이 재건된다.

그 후 창덕궁은 경복궁이 재건될 때까지 270여년 동안 법궁으로 사용되었다.

창덕궁은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하여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왕가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친근감을 주는 창덕궁의 공간구성은 경희궁이나 경운궁(덕수궁)등 다른 궁궐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의 동쪽에 세워진 昌慶宮창경궁과 경계없이 사용하였으며, 두 궁궐을 「동궐」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또 남쪽에는 宗廟종묘가, 북쪽에는 後苑후원이 붙어 있어서 조선왕조 최대의 공간을 형성했다.

그러나 왕조의 상징이었던 궁궐은 여러차례의 화재로 소실과 재건을 거치면서 많은 변형을 가져왔고

1991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1997년 12월에는 UNESCO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궁궐이 되었니다.


창덕궁 정문은 敦化돈화(中庸중용의 大德敦化대덕돈화에서 빌려 온 말로 교화를 도탑게 한다)문.

돈화문은 1412년(태종12)에 건립되었고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서쪽에 세웠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다.

그런데 이 월대는 일제 초기에 왕과 총독부 고관들이 자동차를 타고 창덕궁을 드나들면서 도로에 파묻히고 말았다.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습니다.

원래 돈화문 2층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고 1608년에 재건한다.

보물 제383호.


돈화문 들어가 우회전하면 금천교가 있는데 왕기를 끊으려고 왜놈들이 북악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를 하수관에 연결해서 금천교 밑으로 물이 흐르지 않는다.

금천교를 지나면 진선문이 있다.

이 문에는 신문고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데, <경국대전>에는 1402년(태종2) 이 문에 신문고를 설치하였으나 중간에 유명무실해졌다가 1771년(영조47)에 다시 설치했다.


왕실의 자존심, 仁政殿인정전

조선전기부터 왕의 즉위식이 열리는등 정전으로 주요기능을 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화재로 소실된 후에는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정치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인정전은 창덕궁에서 가장 권위있는 건물로, 왕의 즉위식과 신하하례 및 외국사신접견 등 주요한 국가적의식이 치러졌다.

1405년(태종5)에 건립된걸 1418년(태종18)에 중건한다.

14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610년(광해2)에 재건한다.

인정문 앞, 좌측으로 틀고 왕 즉위식 때 인정문 앞에서 옥새를 받고 인정전으로 들어 가야되는 관계로 朝廷조정이 제법 넓죠.

연산군·효종·현종·숙종·영조·순조·철종·고종 등 총 8명의 즉위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국보 제249호.  


중국 자금성의 월대는 3층.

황제의 나라만 3층이 가능한지라 2층의 월대.

월대 위의 인정전에 용상이 놓이니 달 위에 태양이 뜬 형국이다.  

1908년 무렵에는 인정전이 서양식으로 개조되어 전등이 걸리고 서양식 커튼과 유리창이 생겼으며, 일제에 의해 용마루에 李花紋이화문(오얏꽃 무늬)이 붙여지고 박석이 걷어지고 잔디가 깔리는 등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인정전을 들여다보면 바닥이 널마루.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전돌 뜯어내고 교체한다.

인정전 현판 글씨는 1789년 식년문과에서 장원 급제한 명필 죽석竹石 서영보 솜씨고.

인정전 외행각 마당은 서쪽 진선문 쪽이 넓고 동쪽 숙장문 쪽이 좁은 사다리꼴인지라 당시 상왕이었던 태종은 이 마당이 반듯하지 못하다 하여 박자청을 하옥시킨 일도 있었으나 숙장문 바로 뒤에 산맥이 있어 지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사다리꼴로 만든 것이었다.

고려말 내시 출신인 박자청은 조선개국 후에 궁궐문을 굳게 지킨 일로 태조의 눈에 들어 왕을 경호하다가 창덕궁의 건축감독을 맡게 되었다.

창덕궁뿐 아니라 제릉, 건원릉, 경복궁 수리, 청계천 준설, 경회루, 무악이궁, 헌릉 등 많은 공사를 수행하여 이후 공조판서, 우군도총제부판사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에는 온종일 비가 쏟아지던 날, 선조가 인정전에서 말을 타고 피난길을 나서기도 했다.

인정전에서는 간혹 종친과 노인들을 불러 잔치가 베풀어지기도 했으며, 과거 시험이 치러지기도 했다.

연산군의 폭정의 현장이었다.

아버지인 성종이 인정전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술이 반쯤 취하였을때, 우찬성 孫舜孝손순효는 세자였던 연산군이 능히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없을것을 알고 임금이 앉은 평상을 만지면서 「이자리가 아깝습니다」라고 한 적이 있었다.

이때 성종은 「나는 또한 그것을 알지 마는 차마 폐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고.

연산군은 손순효의 걱정대로 인정전에서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인정전에 단청을 칠하는데 군사 500명을 동원하는가 하면, 청기와를 얹도록 하였고 인정전에서 양로연을 베풀 때 이세좌李世佐가 자신에게 술을 엎지르는 실수를 저지르자 분노하여 그를 국문하게 하였는데 이세좌는 폐비윤씨가 폐위될때 극간하지 않고 그녀에게 사약을 전하였던 사람이었다.

결국 반정군에의해 인정전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인조반정의 공간이기도 하다.

광해군을 찾아다니다가 횃불을 잘못 버려 궁궐건물이 잇달아 타고 인정전만 화재를 면하게 되었다

인조의 즉위식은 창덕궁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인목대비가 있는 경운궁에서 이루어졌다.

인정전 뒤로 왕의 공식 집무실인 便殿편전으로 선정전宣政殿(정치는 베풀어야 한다)이 있는데 창건당시 명칭은 조계청이었고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25)에 광해군이 만든 인왕산기슭에 있던 인경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재건하였습니다.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여인들의 슬픈흔적이 남아있는 樂善齋낙선재


헌종은 명헌왕후에게서 후사가 없자 1847년 김재청의 딸을 慶嬪경빈으로 맞아

중희당 동쪽에 헌종의 서재겸 사랑채 樂善齋낙선재,

경빈의 처소 錫福軒석복헌(福복을 내리는 집),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 거처 壽康齋수강재(<書經서경>에서 말하는 다섯가지 福복중에 장수와 강녕을 기원하는 곳)를 건한니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 면모가 느껴지는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으며, 창살과 벽체의 무늬 등에서 청나라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듣건대, 순(舜)임금은 선(善)을 보면 기뻐하여 황하가 쏟아지는 듯하였다.

... 붉은 흙을 바르지 않음 은 규모가 과도하지 않게하기 위함이고,

화려한 서까래를 놓지 않음은 소박함을 앞세우는 뜻을 보인 것 이다.


군자의 덕목 중에서도 으뜸이 되는 善선을 즐기는 집. (임금이 선행을 베풀면 세상이 즐거워진다는 것이다)

낙선재 현판은 청나라 금석학자 葉志詵섭지선의 글씨이고, 평원루 현판은 翁樹崑옹수곤의 글씨로 모두 추사 김정희와 친교가 있었던 청나라 대가들이다.

낙선재 후원은 존경하는 할머니 대왕대비와 사랑하는 경빈을 위해 지은 집답게 세 채의 집 뒤에는 각각 후원이 조성되어

낙선재 뒤에는 육각형 정자인 平遠樓평원루(현재는 상량정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음)가,

석복헌 뒤에는 閒靜堂한정당이,

수강재 뒤에는 翠雲亭취운정이 남아있다.

특히 낙선재 후원은 서쪽 승화루 정원과 연결되는데, 그 사이 담장에 특이하게도 원형의 滿月門만월문을 만들었다.

건물과 후원 사이에는 작은 석축들을 계단식으로 쌓아 화초를 심었고, 그 사이사이에 세련된 굴뚝들을 배열했다.

궁궐의 품격과 여인의 공간 특유의 아기자기함이 어우러진 대표적인 곳이다.


낙선재는 국권을 빼앗긴 조선 황실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며, 특히 황실 여인들이 최후를 마친 곳으로도 유명하다.

1907년 순종은 황제의 지위를 물려받은 뒤 창덕궁으로 이어했는데,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이후인 1912년 6월부터는 주로 낙선재에서 거주하였다.

이때 순종의 계비인 순정효황후는 석복헌에서 생활하였다.

1966년 조선의 마지막 황후였던 순정효황후는 석복헌에서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63년 환국한 영친왕 李垠이은은 1970년 낙선재에서 생을 마쳤고 수강재에는 마지막 황실 가족인 덕혜옹주 (1912~1989)가 머물렀다.

덕혜옹주는 고종이 환갑에 얻은 아주 귀한 딸이었다.

그녀는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 귀하게 자랐으나, 안타깝게도 1925년 일제에 볼모로 끌려가고 말았다.

이후 대마도 藩主번주(일본의 제후)의 아들인 宗武志소다케시와 강제 결혼하여 딸 소마사에宗正惠를 낳았는데, 정신분열증으로 도쿄 인근의 병원에서 지내다가 1962년 귀국하여 이곳에 머물렀다.

덕혜옹주가 귀국한 이듬해에 李方子이방자(1901~1989) 여사도 귀국해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방자여사는 영친왕 李垠이은의 부인으로 마지막 황태자비였다.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는 각각 낙선재와 수강재에 머물면서, 서로 의지하며 지냈다.

그러다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가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난다.

함께 생활하던 덕혜옹주가 떠나서일까... 열흘 사이로 4월 30일에 이방자 여사도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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