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나. 실학자(?) 정약용 7/7
다산의 사생활1
문과 행이 일치 하지 않았던 기득권자
다산의 아내가 귀양지의 다산에게 혼인 때 입은 붉은 비단 치마를 보낸다.
이 비단 치마에 다산은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쓴다(霞帔帖하피첩).
다산에게는 아들 둘, 딸 둘이다.
딸 중 한 명은 정처에게서 태어났고 또 한 명은 강진의 유배지에서 얻은 첩 홍임의 딸이다.
두 딸에게는 매조도를 그리고 시를 써서 보내었으며 두 아들에게 교훈적 시를 지어 훈계하는 서첩의 표지를 만든다.
많은 학자들의 호평에 힘입어 다산의 부정은 대중의 마음을 울리게 된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이야기에 자연스레 스며 들고 있는 애잔(?)함이란…
지금의 현실에서도 「굶어죽는 사람은 게으르다」는 말은 기득권 보수주의자들이 서구 복지정책을 들먹이며 하는 이야기들이다.
복지정책으로 무산 대중의 삶의 질을 높이면 게을러서 나라가 망한다고.
더군다나 당시의 피폐한 생활을 다산은 암행시절 글로 남겼었다.(앞의 연재글 중)
내용을 보자면...
여기에는 내 너희에게 물려줄 논떼기 밭떼기 하나 없지만 그보다 더욱 나은 두 글자를 물려주겠다.
그것을 정신적인 부적으로 삼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라.
한 글자는 勤근이고 다른 글자는 儉검이다.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 나으니 아무리 써도 줄어들지 않고 평생 다 쓰지 못할 것이다.
흉년이 들어 하늘을 원망하는 사람이 있다.
굶어 죽는 사람은 대체로 게으르다.
하늘은 게으른 사람에게 벌을 내려 죽인다.
- 가경 18년 계유(1813) 7월 14일, 열수(洌水) 늙은이는 다산의 동암에서 쓴다.
광목이나 삼베로 만든 혼례복도 구하기 어려운데 다산의 아내는 비단치마 입고 시집 갔었다고 전한다.
다산의 아내는 (당시)금보다 비싸다는 비단치마를 입고 결혼을 했으며, 낡았다 하더라도 그런 비단치마를 잘라 그림을 그리고 서첩을 만들 정도로 돈이 남아도는 처지의 유배생활인 것이다.
그럼, 왜 다산의 아내는 유배지에 치마를 보냈을까…
다산에게 비단 치마를 보낸 해는 1810년.
1762년에 결혼하였으니 결혼 34년째로 다산의 나이 48세
이상할 수 밖에 없다.
결혼식에 입은 혼례복을 보내었다?
1810년의 다산의 유배 생활을 기록으로 검토해 보면 서울에서 큰 아들이 병들어 죽어가는데도 귀향지에서 다산초당을 짓고 연못을 파고 물을 끌어들이고 여기에 첩을 얻고 방탕한 생활을 한다.
조선의 여인은 혼인 때 오고갔던 사주단자를 고이 간직하였다가 임종 때 무덤까지 가져 갔었다.
그래서 여인의 시신을 묻을 때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사주단자를 관속, 여인의 가슴에 얹은 후에 흙을 한 줌 덮는다.
그토록 소중한 혼례복을 보낼 때의 아내를 다산은 病妻병처라고 한다.
여기서 잠시 다산의 집안을 들춰보면,
조선 시대에 객관화를 위해 자신의 가족이나 자신의 묘지명을 쓰지 않고 남의 가문에서 써 달라고 부탁한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자신의 묘지명을 쓴 딱 한 명이 바로 다산이다.
나의 아버지의 諱휘는 載遠재원이니, 蔭職음직으로 晉州牧使진주목사에 이르렀다.
- 다산 시문집 16권, 自撰墓誌銘자찬묘지명 중
음직이란 조상의 후광으로 과거 시험을 거치지 않고 벼슬에 나아간 것인데 목사는 정3품 당상관이니 과거도 없이 엄청 출세한 것이다.
더구나 평양과 진주는 色鄕색향이라고 하였으니 짐작을 하고도 남는다.
결국 다산은 큰아들의 죽음도 모르고 퇴폐와 향락에 묻혀 있었던것이다.
그리고 어린 아들 懼牂구장의 죽음을 슬퍼하여 지었다.
憶汝行 아들을 그리는 노래
憶汝送我時 지난날 네가 나를 떠나보낼 때
牽衣不相放 옷자락 부여잡고 놓지 않았지
及歸無歡顔 돌아오자 네 얼굴 기쁜 빛 없어
似有怨慕想 원망하는 생각을 품은 듯했네
死痘不奈何 마마로 죽는 것은 어찌하랴만
死豈不枉 종기로 죽었으니 억울타마다
雄黃利去惡 악성 종기 잘 낫는 웅황 썼다면
陰蝕何由長 나쁜 균이 그 어찌 자랐겠는가
方將灌蔘茸 인삼 녹용 이제 막 먹일 판인데
冷藥一何佞 냉약이 어찌 그리 황당한지 원
曩汝苦痛楚 지난번에 네 모진 고통 겪을 때
我方愉佚宕 나는 한창 즐겁게 놀고 있었지
撾鼓綠波中 푸른 물결 속에서 장구를 치고
携妓紅樓上 붉은 누각 위에서 기생을 끼고 놀았지
志荒宜受殃 마음이 빗나가면 재앙 받는 법
惡能免懲創 어찌 능히 징계를 면할까보냐
送汝苕川去 내 너를 소내 마을 떠나보내어
且就西丘葬 서산의 기슭에다 묻어 주리라
吾將老此中 내 장차 그 속에서 여생 보내어
使汝有依仰 너에게 의지할 곳 있게 하려마
- 다산시문집 제2권 송기채 역
1789년 12월생이었고 죽은해는 정확히 기술된곳은 찾을 수 없지만 아들이 인삼 녹용을 먹일 때라고 시에서 밝히고 있다.
인삼 녹용을 먹인다…
조선의 인삼은 전 세계가 탐을 내던 상품으로 당시에 인삼 때문에 유럽의 상인들까지 조선에 관심을 가졌다.
당연히 그를 먹일 수 있는 집이라면 엄청난 부자임에는 틀림 없다.
다산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으며, 돈 있는 남자에게 기생이 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이었다.
다산과 기생의 관계는 다산 문집에 헤아릴 수 없으리 만큼 많이 나온다.
경자년(1780)봄에 진주의 촉석루에서 떠들썩하게 악기를 연주하다 해가 저물어서야 파하고는,
심 비장과 더불어 저포(樗蒲 쌍륙놀이)노름을 하여
3천 전을 따가지고 여러 기생들에게 뿌려주며 즐겁게 놀았던 일을 아직 기억하십니까?
이제는 벌써 19년이 지났는데도 어제의 일처럼 역력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변하기가 아주 쉬워,
저의 聘翁빙옹(다산의 장인 홍화보)과 沈君심군은 모두 黃泉황천에서 눈을 감고 있으며
당시의 甥館생관(사위)이던 나는 營將영장이 되고
그 때의 영장은 節度使절도사가 되어 함께 西路서로(관서지방)를 지키고 있으니
역시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 다산시문집 제18권, 김 절도사(金節度使) 후(㷞) 에게 보냄 곡산(谷山)에서
형이 1790년 과거 급제하였을 때 울산의 아버지 앞에 갔을 때 꽃 같은 기생(花妓)이 부축할 것이니 얼마나 영광스럽느냐는 시를 쓴때는 28세였다.
棗騮一點衝寒草 한 마리 붉은 말로 가을 풀길 혜쳐가며
花妓雙扶上畫楹. 꽃 같은 기생 부측해 그림 누대에 오르니
- 다산 시문집 1권 仲氏登第赴蔚山 奉贈一詩
더욱 심한 표현의 시문도 많으나 여기서는 이걸로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