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의 역사 읽기 IV 근현대사

네번째. 한국전쟁 2/7 참혹한 전쟁의 실상

by Architect Y

; 통일독립국가 건설좌절과 모순의 폭발


북한은 점령된 남한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민중들로부터 최대한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하여 급진적인 사회개혁을 단행하였다.

남한 지역에서의 급속한 사회개혁은 과거 민중운동을 이끌던 그 지역 출신 민주인사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이승만 정권에 의해 파괴되었던 당 조직을 재건하고 동시에 민주청년동맹, 여성동맹, 직업동맹, 농민동맹, 문화단체총동맹 등 각종 대중단체들을 부활하거나 창설하여 민중들을 조직화하고 사회주의 개혁을 실현해 나가는 전위조직으로 활용하였다.

021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성명서〉.jpg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성명서〉

이와 함께 1950년 7월 14일 '인민위원회 선거에 관한 정령'을 발표하고 25일부터 점령지역 전역에 인민들의 자치적 통치기구이자 권력기구인 각급 인민위원회 인민위원 선거를 실시하여 점령된 지역을 인민들에 의해 선출되고 조직된 인민위원회의 인민위원들이 스스로 통치케 하였다.

인민위원회는 '토지개혁에 관한 정령'을 발표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지주들로부터 몰수한 토지를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고 농민들의 부채와 종래의 지세 및 일체의 세금을 모두 폐기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개혁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정책들은 미군과 한국군의 반격에 봉착함으로써 그 실현이 사실상 중단되거나 폐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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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초에 들어서면서 낙동강 방어선에서 대치하고 있던 양측 군대의 전력은 점차 미국측의 우위로 변해가기 시작하였다.

개전 직후부터 시작된 미 공군기들은 북한군의 점령지역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탄 세례를 퍼부었다.

이런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인하여 북한군 점령지역 내의 주요 철도를 비롯하여 도로, 터널, 집하장, 창고 등 군대의 수송이나 보급과 관련된 일체의 시설들이 대부분 파괴되었다.

파괴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민중들의 생활과 직결된 61만채의 주택, 15,000동의 학교, 17,000개의 공장이 완전히 잿더미로 변했다.

당시의 상황을 미 극동폭격사령부 사령관 Emmett O’Donnell오도넬은 다음과 같이 간략히 언급하였다.

024 Emmett O’Donnell.jpg 오른쪽에서 두번째 Emmett O’Donnell

본인은 전체, 거의 전 한반도가 소름끼치는 혼란에 빠져 있다고 진술하고자 합니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이름을 붙일 만큼 가치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 한국에는 더 이상 목표가 없었습니다.


또한 8월 3일 미 제1해병여단을 시작으로 제89전차대대, 제2사단 제23연대, 제6전차대대, 제2사단 38연대가 부산항을 통하여 속속 증파되었다.

1950년 9월 1일 현재 유엔군 병력은 18만여명에 달했다.

당시 북한군의 총 병력은 불과 98,000명 규모에 불과하였다.

말이 유엔군이지 실상은 공군의 98%, 해군의 83,8%, 지상군의 88%가 미군인, 미국의 군대나 다름없는 유엔군으로 포장된 미군이었다.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미군이 쥐고 있고 군장비도 대부분 미국에 의해 공급되고 있던 사정까지 고려한다면 한국전쟁의 양 당사자는 북한과 미국이라는 명제가 다시금 확인되는 셈이다.

전력을 보강한 미군은 1950년 9월 15일 맥아더의 직접 지휘 하에 인천항에 상륙하기 위한 작전을 개시하였다.

15일 미군의 함포사격으로 시작된 인천 상륙작전은 16일 미 전차부대의 인천 상륙, 미 해병대의 김포 비행장 완전 점령, 20일 서울시 공격, 22일 미 제7사단 수원 공략, 한국 해병대 마포, 신촌, 서대문 방면 진입, 25일 서울 시가전 등의 순서로 9월 28일에는 서울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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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워싱턴은 인천상륙작전 개시일인 9월 15일 맥아더에게 38선을 돌파하여 계속 북진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9월 29일 한국군을 필두로 대대적인 38선 돌파 북진공격이 감행되었다.

9월 30일 맥아더는 전 군에게 공식적으로 38선 돌파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 때의 병력 규모는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약간의 참전국군을 포함하여 총 445,446명에 달했다.

38선을 돌파한 미8군은 10월 19일 평양을 함락시켰고, 제10군단은 26일 원산을 점령하였다.

미 제10군단과 한국군 제1군단은 합세하여 개마고원을 점령하고 두만강을 목표로 계속 북동진하였다.


북한 땅에 진주한 미군의 북한주민에 대한 탄압은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북한 전역에서 수 백명 단위로 방공호에 가두어 놓고 불을 질러 죽이는 집단 학살극이 속출하였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야차로 변한 미군 병사들은 본래의 인간적 심성을 상실하고 온갖 비정상적인 만행을 자행하였다.


CBS 방송은 8일(현지시각) 레스터 토드라는 당시 미군 이등병의 증언을 토대로, 지난 51년 북쪽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어린이와 여성 등을 가리지 않고 '걸어다니는 모든 것을 사살하는 작전이 진행됐다'고 폭로했다. 토드는 CBS 회견에서 '여자나 어린이를 포함해 우리 앞에 있는 것은 모두 사살했다'고 말하고, 이 같은 내용을 상부에 보고했으나 함구할 것을 지시 받았다고 전했다.

CBS 방송이 입수한 53년의 한 군 메모에 따르면 토드의 증언을 비밀 분류해야 하는 이유로 '미국을 곤경에 빠뜨릴 수 있다'는 점을 꼽고 '그가 관계 당국 외의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이에 대해 말하지 않도록 하는 점을 확실하게 하라'고 지시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관련, 윌리엄 코언 미 국방장관은 '우선 노근리 사건 조사에 초점을 맞추고, 만약 다른 (학살) 주장들에 충분한 근거가 있을 경우 사안별로 이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 조선일보 1999.10.10.


한 미군 병사는 자신의 고향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머리에 명중될 때의 기분은 정말로 통쾌했다.

나를 쳐다보는 부상자를 목표로 겨냥해서 방아쇠를 당기면 두개골이 날아가고 눈에서는 눈동자가 뽀르르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나야말로 명사수가 아닌가?

- 어느 미군병사가 고향의 신문에 투고한 편지에서, 미촌수수, 한국현대사연구1


최신 장비로 무장한 대규모 미군의 개입으로 인하여 북한군은 극히 불리한 정세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북한군은 무모한 정면대결을 피하면서 신속한 후퇴를 꾀함과 동시에 유격전을 통한 장기적 항전의 태세로 돌입하였다.

북한군은 후퇴 당시 통과하는 지역마다 부대의 일부를 남겨 놓아 이들로 하여금 유격대를 조직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호남지역의 북한군 5개 사단은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의 줄기를 타고 북상했으며 나머지 1만 여명은 계속 남아 지방 유격대와 합류하였다.

이들에 의해 지리산과 가야산 일대 지역에서는 계속적으로 게릴라 전투가 활발하게 벌어지게 되었고 상당기간 동안 이 지역은 유격대의 실질적인 통치 하에 놓여지게 되었다.

그밖의 남한지역에서도 현지 지방 유격대들과 북한군 잔여병력들에 의해 유격대가 재조직 강화되어 미군의 후방 보급로를 차단하는가 하면 야음을 틈타 미군의 후방을 공격하는 등 미군과 한국군을 혼란에 빠뜨리는 유격전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이런 유격대들은 강원도의 윤철상 부대, 전라남.북도의 이현상 부대 등 7~8 개의 유격대가 남한지역에서, 황해도 일대의 구월산 빨지산 부대, 평양.원산간 지역의 조희 빨지산 부대 등 7~8 개의 부대는 북한지역에서 활발한 유격전을 벌리면서 미군과 한국군의 후방을 교란하며 괴롭히고 있었다.

027 빨치산.jpg 빨치산 토벌
028 중국 건국.jpg 신 중국 건국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일 곤혹스러워 한 국가는 불과 1년 전인 1949년 10월에 국가를 세운 중국이었다.

아직은 장개석 국민당 잔당들이 대륙 여기저기서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고 항일전쟁과 국공내전 등 수 십 년에 걸친 전쟁의 참화를 딛고 경제를 건설해야만 하는 시급한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불안한 국내사정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항미원조보가위국 抗米援朝保家爲國"의 기치를 걸고 한국전쟁에 참여한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은 직접적으로 자국의 방위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 국무장관, 국방장관, 맥아더 사령관 등 최고지도자들은 하나같이 만주지역을 폭격하기로 합의하고 있었다.

중국의 한국전에 대한 참전은 자국 영토가 직접적인 공격대상으로 되어 있는 상황에서 추진되었던 것이다. 이 점이 미국의 한국전 개입과는 전혀 다른 측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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