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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Mar 24.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IV 서울 창덕궁 2/2

열여섯. 실질적 법궁, 昌德宮창덕궁 2/2

자연과 조화 가장 한국적인 궁궐, 昌德宮창덕궁 두번째이야기

; 後苑 자연 지형을 살려 만든 왕실의 휴식처


1960년부터 17년간 자유관람제도를 시행한 결과 많은 문화재와 후원의 자연조경이 훼손되었다.

그래 창덕궁은 1980년부터 자유관람 안되었다.

2010년에야 제한적인 자유관람 허용된다.

예약을 필수고 그룹투어로 이루어 진다.

한글설명은 10시부터 1시간간격으로 그 사이 30분 단위 1시간 간격으로 영어와 일어를 번갈아 50명 인터넷 예약, 50명 현장 발권으로.


태종의 창덕궁 창건당시에 조성되어 창덕궁과 창경궁의 공동 후원이다.

이들 궁궐이 다른 궁궐보다 특히 왕실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은 넓고 아름다운 후원 때문일것이다.

그러니 궁을 돌아본다 해도 후원을 보지 않는다면 창덕궁과 창경궁을 제대로 보지 않은것이 된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정자가 불타 버리고,

광해군이 창덕궁과 함께 1610년(광해2)에 재건하기 시작하여

1623년 인조이후 역대 왕들에 의하여 개수.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을 이루었다.

창덕궁 후원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인공적인 정원을 삽입시켜, 최소의 인위적인 손질을 더해서 자연을 더 크게 완성시킨 절묘한 솜씨를 자랑한다.


4개의 골짜기에 각각 芙蓉池부용지, 愛蓮池애련지, 觀纜池관람지, 玉流川옥류천 정원이 펼쳐진다.

4개의 정원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크고 개방된 곳에서 작고 은밀한 곳으로, 인공적인 곳에서 자연적인 곳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하여 결국은 큰 자연인 뒷산 매봉(응봉)으로 연결된다.

서쪽 깊숙한 숲 속에는 대보단이나 선원전 같은 제사 시설이 있는 신성한 곳이다.


세계 대부분의 궁궐 정원은 보고 즐기기 위한 관람용인데 비해, 창덕궁 후원은 여러 능선과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온몸으로 느끼는 체험 정원이었다.

또한 여러  왕가의 휴식과 산책을 위한 곳이기도 하지만, 여러가지 다른용도로도 사용하여 복합적인 기능을 수용한 장소이기도 했죠다

자연을 느끼면서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는 것은 물론이요, 과거시험을 비롯한 갖가지 야외행사가 이곳에서 열렸다.

조선 초기에는 왕이 참관하는 군사훈련이 자주 실시되었고 활쏘기 행사도 열었다.

연못에서 낚시를 하거나 배를 띄우기도하고 꽃구경을 하였으며, 화약을 이용한 불꽃놀이도 하였다.

대비를 모시는 잔치, 종친이나 신하를 위로하는 잔치 등 임금이 주관하는 잔치도 자주 열렸고 왕은 이곳에 곡식을 심어 농사를 직접 체험하고, 왕비는 양잠을 직접 시행하는 親蠶친잠이라는 행사를 열었다.

창덕궁에서 후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원래부터 있었던 길은 아니고 이곳은 세자의 거처했던 동궁인 중희당이 있었던 곳이다.

창덕궁 후원에서 첫번째로 만날 수 있는 공간은 부용정과 주변 전각들일 것이다.


첫번째 정원 芙蓉池부용지(연꽃의 연못)와 宙合樓주합루(천지 우주와 통하는 집)


부용정
주합루
어수문
규장각
영화당

이곳은 후원에 들어서 첫 번째 만나게 되는 공간으로, 휴식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였다.

사각형 연못인 부용지를 중심으로 여러 건물을 지었다.

주합루 일원의 奎章閣규장각과 書香閣서향각등은 왕실 도서관 용도로 쓰였고, 暎花堂영화당에서는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영화당은 동쪽으로 춘당대를, 서쪽으로 부용지를 마주하며 앞뒤에 툇마루를 둔 특이한 건물이다.

부용정에 접해서 북쪽으로 약 300평의 넓이로 연못을 파고 이름을 太液池태액지라 하였는데 지금은 芙蓉池부용지라 부른다.

부용지는 네모난 연못이고 그 안에는 둥근섬을 만들었다.

둥근것은 하늘, 네모난것은 땅을 의미하는 「天圓地方천원지방」의 표현인 것이고, 사상의 근간으로 삼았던것이다.

휴식을 위한 부용정은 두 다리를 연못에 담그고 있는데 마치 사람이 발을 씻는 濯足탁족의 모습이다.

행사가 치러지던 영화당은 연못에 면해 있으며, 학문을 연마하던 주합루는 높은곳에서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다.

宙合樓주합루는 정조 즉위년(1776)에 정조의 지시에 따라 단청을 검소하게 하고 지었다.

이름도 정조가 친히 지었고, 현판의 글씨도 정도의 어필이다.

宙合주합이란 육합六合 즉 상하와 동,서,남 그리고 북의 4방을 가리키는데, 이는 곧 천지天地를 의미한다.

주합루 1층에는 규장각이 있었다.

奎章閣규장각(문장을 담당하는 하늘의 별인 규수奎宿가 빛나는 집)은 정조의 뜻에 따라 역대 임금의 문장과 글씨를 한곳에 모시기 위한 것이다.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주합루로 오르는 정문이 「어수문」인데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말과 같이 통치자는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긴문으로, 정조의 민본정치 철학을 보여 준다. 큰문 하나와 좌우로 작은문 두 개로 나누어진 모습도 독특하다.

부용지의 동쪽에 있는 영화당의 현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영화당 안에는 5임금의 어필이 있는데,

방안에 인쇄된 인조의 어필,

대청 안의 동서에 20글자와 북쪽 들보에 8자의 선조의 어필,

좌우 기둥에 당시唐詩를 쓴 효종의 어필,

남쪽 들보 아래 4자의 현종의 어필,

북쪽 기둥 밖에 서쪽과 북쪽에 숙종의 어필이다.


숙종이 영화당에서 바라본 연못의 경치를 친히 시를 지어 노래하고, 이를 친히 써서 판에 새겨 영화당에 걸게 했다.


빙그레 화란畵欄에 기대어 작은 연못 굽어보며

조용한 정원에 일 없으니 맑은 빛 구경한다.

한 쌍의 오리는 옥체玉砌 위에 뒤뚱거리고

고기새끼는 뽐내며 우쭐거리는 양 그 모습이 희망에 차 있다.

- 두번째 정원 愛蓮池애련지와 倚斗의두합


1692년(숙종18)에 연못 가운데 섬을 쌓고 정자를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섬은 없고 정자는 연못 북쪽 끝에 걸쳐 있다.  

愛蓮애련은 연꽃을 특히 좋아했던 숙종이이름을 붙여, 연못은 애련지가 되었다.

1827년(순조27) 효명세자는 애련지 남쪽에 의두합을 비롯한 몇 개의 건물을 짓고 담장을 쌓았는데 현재 寄傲軒기오헌 이라는 현판이 붙은 의두합은 4칸의 단출한 서재로, 단청도 없는 매우 소박한 건물이다.


애련지
의두합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를 위해 사대부저택처럼 지은 공간, 演慶堂연경당


창덕궁 후원 2번째 공간인 애련지일원에 위치한 연경당은 낙선재와 함께 궁궐건물형식을 취하지않고 사대부저택처럼 지어진 건물이다.

궁궐생활에 탈피하여 조용한 숲속에서 사대부저택처럼 집을 짓고 휴식을 취하고 싶은 구한말 국왕들의 취향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국왕에 즉위하기 전 어린시절을 私家사가에서 보냈던 고종은 궁궐보다는 사대부저택을 선호하여 이곳 연경당을 애호했으며, 경복궁에도 후원에 건청궁을 짓고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손님들을 접견하였다.


연경당은 원래 순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손자로 세도정치가 극심했던 구한말 왕권을 회복할 수 있는 인물로 많은 사람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한 효명세자(1809~1830년)가 아버지 순조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조선 제22대 왕 정조, 중전인 효의왕후가 아들을 못 낳았다.

4명의 후궁 들이는데...

첫째 원빈 홍씨 아들 못 낳고 요절하고

둘째 효빈 윤씨 역시 아들 못 낳고

세째 의빈 성씨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 출산하여 세자 책봉하지만 문효세자 5살에 병사하고

마지막으로 수빈 박씨 아들이 순조에 오른다.


1800년 순조는 이제 11살, 노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된다.

25년간 기다린 정순왕후는 이제 56살로 폭풍을 일으킨다.

정조의 모친 66세의 혜경궁 홍씨, 48세의 정조부인 효의왕후, 31살의 순조생모 수빈 박씨 다 무릎을 꿇는다.

천주교 개종한 은언군(순조 삼촌)부인, 정조의 외삼촌인 홍낙임(혜경궁홍씨의 친동생) 사형, 시파(정조의 부친인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세력은 시파, 사도세자의 행실을 비판하는 세력은 벽파)인 다산 정약용 학문이 높으니 유배보내고 정조의 친위부대였던 장용영 해체하여 정조의 측근들 전멸되는데도 순조는 발언권이 없다.

드디어 1803년 순조의 친정이 시자되어 경주 김씨들 내쫓으며(정순왕후가 경주김씨) 소용돌이 속 경주김씨인 추사 김정희도 유탄 맞고 제주도로 유배가게 된다.

1811년 홍경래의 난. 조선시대 내내 북한은 찬밥인지라 고려의 유민인 홍경래가 엎었다.

1827년 순조 건강을 이유로 세자가 총명하고 영리하니 대리청정시킨다.

대리청정을 명할때 효명세자는 19살 순조는 38살이다.

1828년 효명세자는 124칸 한옥을 지어 부친을 모신다.


演慶堂 연경당. (경축행사를 벌이는 집)


연경당 앞을 흐르는 개울은 은하수.

오작교를 건너야 연경당으로...

현실을 떠나고 싶은 의미.


돌다리 앞의 괴석 받침대 윗면 네 모서리에는 달나라에 산다는 두꺼비가 기어 다니는 조각을 해 놓았다.

신선이 사는 이상적인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연경당은 마치 젊은 미망인처럼 담담하고 외롭다

-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미술사학자 최순우


1828년 효명세자는 연경당에서 어머니 순원왕후의 40세 생일축하 진작례(왕실의 경축행사 때 신하들이 임금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고 예를 표하는 의식)를 연다.

순조는 사대부 옷으로 갈아입고 평생 처음으로 행복한 여가를 보낸다.

어머니 순원왕후를 위해 지은 춘앵전은 이른 봄날 아침에 나뭇가지에서 노래하는 꾀꼬리의 자태를 무용화 한 향악정재. (정재는 궁중의 잔치 때 선조들에게 바치는 춤)

형식과 절차를 중시하는 당악정재에 비해 향악정재는 자연스럽고 단순하여 정성만이 돗보인다.


곱기도 하구나 달 아래 걸어가는 그 모습.

비단 옷소매는 춤을 추듯 바람에 가벼이 날리도다.


길이 여섯 자의 제한된 화문석 위에서 한없이 느리게 무용 수가 혼자 춤을 춘다.

효명세자는 이런 풍류를 즐기는 사대부들이 부러웠던 것이다.

같은해 효명세자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거리낄 것 없는 여유로움을 즐기겠다는 기오헌을 건립한다.

이제 안동김씨 김조순의 세도정치는 시작되어 효명세자가 말만 꺼내면 외할아버지 김조순의 반대의견을 낸다.

효명세자는 3년 만에 가고, 순조는 다시 왕이 되지만 1834년 45세로 생을 마감한다.

현재의 연경당은 1865년 고종이 새롭게 건립했다.

사대부 살림집의 제도를 본떠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서재인 선향재는 중국풍의 벽체와 서양풍 차양을 설치했고 뒷마당 모퉁이 높은 곳의 농수정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것 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이제 돌아 나가면서 후원 가운데 가장 늦게 갖춰진 것으로 원래 모습은 네모나거나 둥근 3개의 작은 연못들이 있었는데, 1900년대 이후 하나의 곡선형으로 바뀐 觀纜池관람지를 지나고,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流觴曲水宴유상곡수연을 벌인 玉流川옥류천(바위에 새겨진 玉流川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으로 후원은 마무리됩니다.

존덕정 폄우사
관람정 승재정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 소요암
청의정
태극정

아이들과도 좋고

친구들과도 좋고

아님 그저 혼자라도 왕좌가 아닌 한 사람으로,

선비로 살기를 바랜 마음과 함께 유유히 거닐며봄도 나쁘지 않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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