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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Apr 01.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IV 서울 창경궁

열일곱. 효의 궁궐, 昌慶宮창경궁

왕실여성 삶의 체취가 남은 魂殿혼전과 사도세자참극현장.


昌慶宮창경궁.

연세(?)가 좀 있으신 분들이라면 한번쯤 부모님 손잡고 도시락 싸들고 동물 구영하러 창경원 구경간 추억이 있을것이다.

오늘은 그 기억저편으로 희미해진 궁궐을 거닐어 본다.

1400년 태조 이성계의 5남 이방원이 조선 제3대 왕에 오른다.

1418년 3남 세종에게 병권 빼고 왕관 넘겨준다.

너무 많이 죽여 이제 힘들다.

세종은 조선 최고의 성군이 된다.

세종은 부랴부랴 창덕궁 동쪽에 壽康수강(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십시오)궁 건립하여 아비를 모신다.

이방원은 사냥으로 시간을 보낸다.

1422년 이방원 56세로 붕어하고 죽어서 이방원은 유배 떠난다.

지금의 내곡동에 헌릉 조성하는데 아들 세종도 막지 못한다.


왕실여성의 체취, 景春殿경춘전


1470년 13세에 왕에 오른 성종은 할머니인 세조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는다.

7년 만에 친정 시작하니 할머니 정희왕후, 어머니 소혜왕후, 작은 어머니 안순왕후를 모실 궁이 필요합니다.

조선 제9대 왕 성종이 서거정을 찾았다.

궁에 할머니들이 너무 많아, 1484년 버려져 있던 수강궁 재건축에 나서 경복궁, 창덕궁에 이은 한양의 3번째 궁궐이 된다.


정문은 弘化홍화(널리 교화하다)문. 보물 제384호

영조는 이 흥화문 앞에서 균역법에 대한 찬반 여부를 백성들에게 직접 물었다.

홍화문 들어서면 玉川橋 옥천교.

옥구슬 흘러가는 다리.

보물 제386호.

궁궐 다리로는 유일한 보물.

明政門 명정문 들어서면 좌우로 24개의 품계석이 늘어서고. 밝은 정치를 펼치는 집.

안에는 까만 벽돌이 깔려 있고 용상 뒤로 日月圖일월도(해와 달, 그리고 중국의 5악岳 중 하나인 서왕모西王母가 살고 있다는 쿤룬산崑崙山을 주제로 그린 그림. 화면의 대부분을 점하는 다섯 개의 큰 봉우리와 그 아래 소나무, 폭포, 파도, 상단 좌우에 해와 달을 포치시켜 좌우균형을 갖춘 그림. 임금은 천명을 받아 삼라만상을 통치함을 나타내며, 하늘의 보살핌으로 자손만대로 왕실과 나라의 무궁함을 기원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 병풍이 자리 잡고, 명정전 용상 뒤에 ‘일월도’를 걸었다.

해와 달 아래 앉아 백성을 잘 보살피라는 것.

<성종실록>에는 기록하고 있다.

의정부 좌찬성 서거정이 명을 받들어,

신궁의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지어서 올렸는데,

殿전은 명정전·문정전·수령전·환경전·경춘전·인양전·통명전이고,

堂당은 양화당·여휘당이고, 閣각은 사성각이라 하였다.

 


* 서거정 徐居正 본관 達城달성, 호 四佳亭사가정(4개의 아름다운 정자)

1444년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박사 등을 거쳐 대사헌에 올랐으며,

조선시대 최초로 兩館大提學양관대제학이 되었고 육조판서를 두루 지내고

1470년 左贊成좌찬성에 이르는 등 45년간 여섯 왕을 섬기며 그 흔한 유배 한 번 안간 선비


景春殿경춘전은 바로 창경궁에 세워진 건물 중의 하나다.

스물여섯 칸의 비교적 큰 전각인 경춘전에서는 창경궁이 세워진 의도대로 많은 왕실의 여인들이 거처하며 그들의 자취를 남기고 떠났다.

경춘전에서 제일 먼저 생활했던 여인은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1437~1504).

그녀는 세조의 장남인 덕종의 아내로, 덕종이 요절하여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아들 성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대비(인수대비)가 된 인물이다.

인수대비는 학식이 깊어 부녀자들이 지켜야 할 도리인 「內訓내훈」 을 간행한 것으로 유명하나 인수대비는 말년에 이르러 손자 연산군에 의해 폭력을 당하기도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1504년(연산군10) 4월 인수대비는 경춘전에서 68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장희빈과 함께 사극의 단골 인물로 등장하는 인현왕후(1667~1701)도 경춘전에서 거처했다.

그녀는 복위된 이후 경춘전에서 생활하다가, 1701년(숙종27) 8월에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녀의 죽음이 병이아닌 장희빈의 저주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장희빈이 就善堂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하고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것이다.

1762년 남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비극을 겪은 혜경궁 홍씨(1735~1805)도 경춘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혜경궁과 경춘전의 인연은 이곳에서 재간택을 받은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한중록> 에는 1744년 10월28일 재간택을 받을때, 경춘전과의 첫 인연을 기록하고 있다.


정성왕후와 선희궁께서도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며, 여러 옹주들이 손잡아 귀히 대하니라.

나를 즉시 내보내지 않고, 경춘전이라는 집에 머물게 했는데,

격에 맞는 차림을 갖추려고 그랬는지 그곳에서 오래 머물게 하였다

혜경궁은 경춘전에서 남편인 사도세자와 생활하며 아들 정조를 낳았으며, 노후의 시간도 여기에서 보냈다.

<영조실록>에는 사도세자가 자주 어의들의 진료를 받았음도 나타난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후, 홀로된 어머니를 위해 창경궁에 따로 慈慶殿자경전을 지어 드렸다.

그곳에서 생활하던 혜경궁은 순조가 즉위한 뒤에, 며느리인 효의왕후에게 자경전을 넘겨주고 경춘전으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혜경궁은 회갑이 되던 1795년(정조19)부터 궁중에서의 삶을 되돌아보며 <閑中錄한중록>을 쓰기 시작했다.

이 집필은 순조 때에도 계속되었는데, 경춘전은 한중록집필의 중심 공간이기도 하다.

아들과 손자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을 지켜 보며 노후를 보내던 혜경궁은 경춘전에서 1815년(순조 15) 12월에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도세자참극의 현장, 文政殿문정전


문정전이 영조의 妃비인 정성왕후의 혼전으로 사용되었을때, 이곳 앞마당에서는 역사적으로 큰 사건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인 비극적인 사건.

바로 1762년의 壬午禍變임오화변 이 일어났던 것이다.

당시 문정전은 魂殿혼전(왕이나 왕비의 국상중에는 장사를 마치고 난뒤, 종묘에 입향할 때까지 신위를 모시는 공간)이 되면서,「徽寧殿휘령전」으로 잠시 명칭이 바뀌었다.

영조는 휘령전을 지날때, 죽은 왕비 정성왕후의 혼령이 자신에게 와서 사도세자를 제거해야 한다고 일렀다고 했다한다.

사도세자를 죽여야 하는 이유를 혼전에서 혼령의 소리를 들었다는 것으로 정당화시키려했던 것이다.


세자가 집영문 밖에서 지영하고 이어서 어가를 따라 휘령전으로 나아갔다.

임금이 행례를 마치고, 세자가 뜰가운데서 사배례를 마치자,

임금이 갑자기 손뼉을 치면서 하교하기를,

“여러 신하들 역시 신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왕후께서 정녕하게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하고,

이어서 협련군에게 명하여 전문을 4,5 겹으로 굳게 막도록 하고,

또 총관등으로 하여금 배열하여 시위하게 하면서 궁의 담쪽을향 하여 칼을 뽑아들게 하였다.

궁성문을 막고 각을 불어 군사를 모아 호위하고, 사람의 출입을 금하였다.

- 영조실록 1762년(영조38) 윤5월 13일 


영조는 문정전에서 세자에게 칼을 휘두르며 자결할 것을 명했다.

세손인 정조 또한 아버지의 죽음을 방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문정전에서 남편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상황을 지켜 보았던 혜경궁 홍씨도 <한중록> 에서 그날을 증언하고 있다.


날이 늦었다 재촉하여 나가시니 대조(영조)께서 휘령전에 앉아 계셨다.

칼을 안고 두드리시더니, 그 처분을 하시었다.

차마 망극하니 이 모습을 내가 어찌 기록하겠는가.

서럽고서럽도다.

소조(사도세자)께서 나가시자 대조의 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휘령전과 덕성합이 멀지 않아 담밑에 사람을 보냈다.

“벌써 세자께서 용포를 벗고 엎디어 계십니다.”

대처분인 줄 알 고 천지가 망극하여 내 마음이 무너지고 깨지는 듯하였다.

거기 있는 것이 부질없어 세손이 있는곳에 와, 서로 붙들고 어찌할 줄 몰랐다.

신시(3~5시)즈음에 내관이 들어와 말했다.

“밧소주방 의 쌀 담는 궤를 내라 합니다.”어쩐 말인고!

저들도 어찌할 줄 몰라 하며 궤를 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세손궁이 망극한 일이 있는줄 알고 대문안에 들어가 아뢰었다.

“마마! 아비를 살려주소서!”

“나 가라!”

대조께서 엄히 말씀하셨다.

할 수 없이 세손은 왕자 재실로 돌아가 앉아 있었다.

내 그때의 정경 이야, 고금천지간에 없었다.

 ... 내 간장은 마디마디 끊어지고 눈앞이 캄캄하니 가슴을 두드린들 어찌하겠는가.

 당신의 용맹스러운 힘과 건장한 기운으로 아버님께서

“궤에 들어가라!”

하신들 아무쪼록 들어가시지 말것이지 어찌 들어가셨는가.

처음에는 뛰어나오려 하다가 이기지 못하여 그 지경에 이르니, 하늘이 어찌 이렇게 하셨는지.

만고에 없는 설움뿐이다.

내가 문 밑에서 목놓아 슬피 울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 한중록, 한중만록 3권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처분은 가혹하였다.

3~4시 무렵 밧소주방의 뒤주가 들어왔는데 크기가 작아서 쓸 수가 없자 다시 어영청에서 쓰는 큰 뒤주를 들여왔고 영조는 여기에 들어갈 것을 명하였다고 한다.

결국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에 의해 뒤주에 갇히게 되었고, 영조가 직접 뚜껑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서 8일만에 28세라는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景春殿경춘전(봄을 우러르는 집) 정조, 헌종이 태어난 집.

歡慶殿환경전(경사스러움을 기뻐하는 집) 중종이 승하한 집.

通明殿통명전(밝음을 알리는 집) 침전. 보물 제 818호.

養和堂양화당(화목을 기르는 집) 철종비 철인왕후가 승하한 집.


춘당지는 원래 왕이 직접 농사를 지어 보던 내농포라는 논이 있던 터.

일제때 논을 파헤치고 일본식 연못 조성했다.

활을 쏘고 과거를 보던 춘당대 앞의 연못이라 춘당지라고 하는 거고.

창경궁의 면적은 53,000평.

살아 있는 역사박물관 「창경궁」을 찾는 이는 이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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