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번째. 한국전쟁 4/7 미군과 정부의 학살사건
1950년 7월에 일어난 미군에 의한 노근리 양민학살사건과 1950년 전쟁 초기 발생한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을 이야기해 본다.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은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그리고 미군 당국자 등 가해자들의 은폐로 오랫동안 덮여 있었지만, 1994 년에 살아남은 한 주민이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을 주제로 한 저서를 출판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1999년 9월 9일 AP통신 최상훈 기자등의 노력으로 본격적인 진상규명이 시작되었다.
같은해 10월 29일에는 그동안 시종일관 학살 사실을 부인하던 미군도 현지조사를 실시하여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사건임을 시인했다.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의 진상조사 과정에서 1950년 전쟁 초기 남한 전역에 걸처 자행되었던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의 진상도 오랜 세월 강요되었던 침묵을 깨고 세상밖에 들어나게 되었다.
1950년 7월 미 제1기병사단 7기병연대는 북한군에게 쫒겨 계속 남쪽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7월 23일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진입한 미군은 마을 사람들을 집결시켜 피난을 시킨다는 이유로 600여명의 마을 주민들을 미군의 인솔하에 3일 동안 계속하여 하천이나 도로변에 노숙시키며 남쪽으로 끌고 내려 갔다.
7월 26일 아침 미군이 인솔하던 피난민 행렬에 대한 미 공군 비행기의 갑작스런 폭격이 시작 되었다.
이에 놀란 피난민들은 인근 노근리 쌍굴다리 밑으로 도망쳐 숨었으나 그동안 이들을 인솔하고 다녔던 미 제1기병사단 7기병연대 예하부대 소속 미군들은 쌍굴다리 양쪽을 완전히 포위하고 피난민들을 향하여 기관총 사격 등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무고한 양민들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7월 26일~ 29일까지 4일 동안 벌어진 미군의 잔악한 만행에 의하여 사망자가 135명, 부상자 47명 등 182명의 살상이 있었다고 공식 확인되었으나 생존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400여명의 희생자가 더 있을 것이라 합다. 당시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10여명이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1949년 6월 5일 '국민보도연맹'이라는 관변 반공단체를 조직하였다.
국민보도연맹은 일제 강점기 조선민중들의 사상 탄압에 앞장섰던 ‘시국대응전선 사상보국연맹’을 본떠 만든것으로, 당시 반공 사상 검사로 악명을 떨친 선우종원과 오제도가 주도하여 만들었으며 총재는 내무부 장관이, 고문은 국방부 장관 등이 맡았고 회장은 전향한 공산주의자 정백을, 간사장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조직부장이었던 박우천을 임명하였으나 실질적인 운영은 이들이 아니라 이승만 정부의 공안부 검사와 대공경찰이 조직을 관리하고 운영하였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정권은 7월 8일 계엄령을 선포한 후 군과 경찰을 앞세워 예비검속을 하고,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하여 구금한 후 전국적으로 수십 만 명을 학살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국 형무소에 수감된 제주 4 . 3 항쟁 관련자들을 포함한 좌익사범, 부역 혐의자들도 전국 곳곳에서 불법적이고 잔악한 학살을 당해야만 했다.
특히 경상도 일대의 보도연맹 학살은 그 피해 정도가 잔인하고 심각했는데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할 때 산골짜기, 우물, 갱도 등에 모아다가 한꺼번에 총살하였다.
경북 경산에서는 일제때 코발트를 채굴하던 폐광의 갱도에 보도연맹원들을 몰아 넣고 총격을 가하여 살육한 뒤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르고 갱도를 막아버리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학살은 전향한 좌익세력들이 전쟁을 기화로 보도연맹 조직을 이용해 반정부 활동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이승만 정권의 막연한 불안감으로 시작되어 경찰과 군 그리고 서북청년단 등 극우 폭력단체에 의해 자행됐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미군 장교의 참관 하에 학살이 이루어졌음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당시 보도연맹원 중에는 공산주의자가 아닌 평범한 민간인들도 많이 포함돼 있다.
보도연맹원학살사건으로 인한 정확한 희생자수는 공식적인 자료나 확인된것이 없어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최소 20만~30만여 명이 학살되었고, 어떤 이는 백만명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다.
4·19 혁명 이후 장면 정권에서는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를 위하여 희생자 유가족들의 접수를 받았었지만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하자 신고한 유족들을 빨갱이로 몰아 사법처리 하는 등 또 다시 정부의 부당한 탄압을 받아야만 했다.
그 이후 40 년 이상을 유족들은 침묵을 강요당하고 연좌제로 인하여 사회활동에 큰 제약을 받는 등 고통의 세월을 살아야만 했다.
1951년 2월 초 거창, 함양, 산청 등 지리산 남부지역의 유격대를 토벌하기 위하여 제11사단 제9연대는 합동작전에 돌입하였다.
유격대 토벌을 위한 합동작전이 개시됨과 동시에 곳곳에서 민중들에 대한 대량 학살극이 자행된다.
산청, 함양, 합천, 남원, 순창 등 지리산 주변 산악지방 여러 곳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집단학살의 참극이 벌어졌으며, 이밖에도 부녀자 강간, 물품강요, 재산약탈 등 온갖 만행이 토벌군에 의해 저질렀다.
2월 10일 경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와 덕산리를 거쳐오면서 판량계곡과 청연부락 뒷산 등에서 집단학살의 피잔치를 즐겼던 토벌군은 2월 11일 대현리, 중유리, 화룡리 일대의 마을 주민 1,000여 명을 과정리 소재 신원국민학교에 집단 수용시켰는데 이들은 대부분이 노약자, 부녀자, 어린 아이들이었다.
다음날 토벌군은 이들 주민들 중에서 군인 및 경찰 가족과 지역 유지들과 그 가족들만을 골라낸 뒤 나머지 주민들을 모두 근처의 박산골짜기로 끌고가 기관총으로 집단 학살한 후 시체는 휘발유를 끼얹어 불태워 버렸다.
이렇게 해서 무참히 목숨을 잃은 주민의 수는 600여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토벌군은 자신들의 행위를 은폐하기 위하여 학살된 사람의 숫자를 187명으로 줄이고 아울러 대상도 모두가 '공비 및 공비와 내통한 분자'라는 허위보고를 상부에 올렸다.
이들 학살자들에게는 죄없는 양민에 대한 대량 학살의 만행도 그 날 하루의 전과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이날의 학살의 진상은 민중들의 분노의 불꽃을 지피면서 입에서 입으로 급속도로 남한 전역으로 알려져 갔고 당황한 이승만 도당은 신성모 국방장관의 다음과 같은성명을 통하여 뻔뻔하게 학살을 부인하고 진실을 은폐하려 하였다.
경남지구 계엄 민사부장 김종완 대령의 현지조사 결과 사망한 187 명은 모두 공비이거나 공비와 내통한 불순분자임이 밝혀 졌다
외국의 도움으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마당에 이 같은 군의 정상적인 작전수행이 비행으로 모략되어 외국에 알려진다면 전쟁 수행에 지장을 초래하고 군의 사기를 해친다.
이승만 도당의 이런 진실의 조작과 은폐 기도에도 불구하고 1951년 3월 29일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에 의하여 거창 양민학살사건의 진상이 발표되고 국회와 내무부, 법무부, 국방부의 합동조사단이 구성되었다.
총 16명으로 구성된 합동조사단은 1951년 4월 7일 조사를 위해 신원면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유격대로 가장한 군인들의 공격을 받고 별다른 성과도 없이 철수해 버렸다.
그러나 거창 양민학살사건에 대한 민중들의 규탄의 목소리는 점점 더 높아만 갔고 다급해진 이승만 정권은 어쩔 수 없이 사건의 재조사에 착수하여 사건을 축소하고 왜곡하여 제9연대장 오익경, 제3대대장 한동석, 대대 정보장교 이종대 만을 구속하여 군법회의 회부하였고 국방장관 신성모를 해임시키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하였다.
무고한 양민 600여명을 잔악하게 학살한 사건을 군법회의에서 이종대는 무죄 석방하고 겨우 김종원의 징역 3년, 오익경 무기, 한동석 징역 10년 등 3명에게만 책임을 물었으며 이 또한 복역 1년만에 모두 석방시켜 오익경과 한동석은 현역으로 복귀시켰고 김종원은 경찰 고위 간부로 다시 기용되었다.
이들에 대한 재판을 끝으로 하여 이승만 정권의 사주에 의한 군과 경찰의 양민학살사건은 더 이상 거론되지 못하였고 그 진실은 한참을 역사의 뒤켠 침묵의 바다 속 깊히 묻혀 있어야만 했다.
* 이 작품은 학살자가 실제로 누구인지, 학살을 당하는 사람들이 실제 누구를 표현한 것인지 분명치 않다.
피카소 본인도 밝히지 않은 채 단순히 한국에서의 학살이라고 하여, 그가 영감을 받은 사건이 어떤 것이었는가에 대해서 많은 추측이 있어왔다.
피카소가 공산주의자로서 미국에 반대했다는 점을 들어서,
미군에 의한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No Gun Ri Massacre, 1950)을 표현했다는 설도 있으며, 황해도 신천군에서 5,000명이 넘는 민간인이 학살당했던 신천 양민 학살사건(Sinchon Massacre, 1950)이라는 추측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