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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Apr 11.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IV 서울 덕수궁

열여덟. 대군의 집에서 왕궁으로, 德壽宮덕수궁

서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하면서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덕수궁.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근대의 길로 나아갔 던 공간.


임진왜란 때 의주로 도망갔던 선조가 6년 만에 돌아오니 다 불타고 폐허.

선조가 잘 곳이 없다.

그래 월산대군의 집에 머물게 된다.

왕이 자고나니 이제 慶運宮경운궁.

옆집에 살던 심의택(조선12대 왕 인종의 부인인 인순왕후의 동생)을 비롯한 왕족들 역시 날벼락을 맞았다.

북촌엔 양반이 남산엔 한량들이, 이곳 정동(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이 있어서 동네 이름이 정릉)에는 왕족이 모여 살았다.

경운궁은 정동 2번지, 3번지를 다 차출한다.

그래 심씨 일가도 쫓겨나고..

바로 이 곳에서 조선의 역사를 바꾼 사건이 일어난다.

1623년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왕으로 추대하는 한편 경운궁에 유폐된 인목대비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인조반정의 무대가 되었던 경운궁.

광해군(1575~1641/재위 1608~1623)은 가장 강력한 왕위계승의 라이벌이었던 영창대군(1606~1614)과 그를 지지하는 세력에 대한 정치적 보복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선조는 훗날을 염려하여 일곱명의 신하를 따로 불러 어린 영창대군을 잘 보살펴 줄 것을 신신당부했지만, 광해군 즉위 후 여 러차례의 역모 사건이 일어났고, 그 위협은 영창대군의 숨통을 조여왔다.

1613년 문경새재에서 발생한 銀商은상살해사건은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정국에 기름을 붓는격이 되었죠.

은상 살해의 주범으로 밝혀진 박응서를 위시한 서얼들은 국문 도중에 놀라운 진술을 했다.


거사 자금을 확보해 김제남(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을 중심으로

왕(광해군)과 세자를 죽이고 영창대군을 옹립 하려 했다


사건의 파장으로 김제남은 처형되었고,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강화도로 끌려갔다.

1614년 大北派대북파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부사 鄭沆정항은 영창대군을 작은 골방에 가두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蒸殺증살시켰다.

선조의 계비이자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의 입장에서 광해군은 자식을 죽인 원수였던것이다.

두 사람은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였지만, 한 궁궐에 있을 수가 없었다.

1615년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홀로 두고 혼자만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1618년에는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西宮서궁으로 칭하였다.

인조반정의 구실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것이 인목대비의 서궁유폐였다.


대비가 생활했던곳은 昔御堂석어당.


명례궁(서궁에서 왕비의 토지를 관리했던건물)에 갇히어 지낸지 십년이 되어가니 모든 물건이 다 동나서 신창 기울 노끈이 없어 베옷을 풀어 꼬아 입고, 옷 지을 실이 없어 모시옷과 무명옷을 풀어쓰곤 하였다

......

윗 사람은 치마할 것 없어 민망히 여기고 있었더니

짐승의 똥에 쪽새(염료로 쓰는쪽풀)가 들어있어 한 포기 났거늘

......

남빛물감 들이기를 시작했다.

쌀을 일 바가지가 없어 소쿠리로 쌀을 일었더니 까마귀가 박씨를 물어와

......

네 해째는 큰 박이 열렸다.

 - 계축일기


1623년 마침내 인목대비 에게도 한 줄기 빛이 찾아왔다.

반정의 공간, 昔御堂석어당과 卽祚堂즉조당


1623년 3월 13일 삼경(밤 11시~새벽 1시)무렵, 반정을 도모한 무리들이 弘濟院홍제원(중국의 사신들이 성안에 들어오기 전에 임시로 머물던 곳) 근처로 집결한다.

서인은 광해군 시절 북인들에 의해 권력에서 소외당하자 이에 불만을 품어 세력을 결집한것.

彰義門창의문(서울의 북소문)에 이르러 빗장을 부수고 들어가 곧바로 창덕궁에 이르러, 광해군 정권을 타도하는데 성공하였다.

반정을 성공시킨 서인들은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를 창덕궁으로 모셔오기 위해 석어당으로 향한다.

반정의 명분으로 제시했던 廢母殺弟폐모살제(어머니를 유폐시키고 동생을 죽임)의 주인공 대비에게 반정을 공식적으로 승인받기 위함이다.

그러나 인목대비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귀가 서궁에 가서 궐문에서 통곡한 뒤에 비로소 승전 내시를 불러서 사정을 아뢰고 모시어 갈 것을 청하였더니 대비가 크게 노하여 이르기를,

“누가 이 일을 일으켰기에 나를 데려가겠다고 하느냐?”하였다.

그때 승지 홍서봉이 문안드리러 왔다고 아뢰니, 대비가 크게 노하여

“승지는 누구의 명으로 내게 왔느냐? 그러면 이미 스스로 임금이 되었는데 나를 부르는 것은 무슨 이유이냐?”

하였다. 대비가 또 이르기를

“죄인(광해)의 부자와 이첨의 부자와 여러 흉당들의 목을 잘라 모두 달아맨 후에야 궁에서 나가겠다.”

하였다. 이귀가 답하기를

“죄인의 부자는 임금으로 있었으니 쉽사리 처치할 수 없사옵고, 이첨의 무리는 방금 군사를 풀어 찾고 있사오니 잡아오면 마땅히 여쭈어 명을 받자와 처단하겠나이다.”

하였다. 대비가

“연흥부인(延興夫人)에게 문안하고자하니 승지를 보내라.”

고 명하므로 이귀가

“아직 임금을 책립하기 전이므로 승지를 보낼 수 없다.”

고 여러번 아뢰어도 노여움을 풀지 않고 자꾸 언짢은 말만하므로 이귀가 부득이 아들 시백을 보내어 인조에게 친히와서 뵙도록 아뢰었다.

- 연려실기술 23권 인조조고사본말

대비가 강경한 입장을 밝히자, 인조는 친히 경운궁으로 나아간다.

인조는 경운궁에 이르러서는 말에서 내려, 서청문(西廳門) 밖에 들어가 재배하고 통곡하며 엎드려 대죄하였으며 말하였다.


혼란 에 일이 많고 겨를이 없어 지금에야 비로소 왔으니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신하들은 속히 御寶어보(옥새)를 전할 것을 청하였으나, 인목대비는 이를 반대하였다.

어보를 전하는 큰일을 이렇게 늦은 밤에 급박하게 초라한 예로 행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인목대비는 석어당 앞마당에서 인조에게 어보를 전하였다.

따라서 인조가 인목대비를 찾은 것은 정통성에 차질이 없게한 조처라고 할 수 있던것이다.

인목대비는 인조에게 어보를 전달한 뒤 광해 군에게 당한 원한을 갚아주기를 간절히 청하였다.

이 엄청난 사건으로 정치적으로는 북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되었고, 사상적으로는 서인들에의해 성리학 중심주의가 굳어졌으며, 외교적으로는 親明排金친명배금과 大明義理論대명의리론이 자리를 잡는 계기가 되었다.

1882년 한미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이후

1884년 미국공사 루시어스 푸트는 민계호의 한옥을 매입하고 미국대사관저 건립한다.

1897년 漱玉軒수옥헌(옥을 씻는 전각) 건립. 수옥헌의 용도는 황실도서관.

1900년 수옥헌 소실되자 미국공사는 잽싸게 덕수궁 석조전 사이로 미국대사관저로 가는 길을 냈다.

1901년 수옥헌 중건. 설계는 왕실 전속 건축가 사바찐.

고종은 1902년


덕수궁 인근에 가옥을 높이 지어 궁중을 내려다보는 일이 없도록 하고,

궁궐 인근 지역의 땅은 누구를 막론하고 마음대로 파는 일이 없도록 해라.


명하지만 이미 늦었다.

미국대사관저 가는 길 탓에 수옥헌은 덕수궁 밖에 나앉은 모양새가 됐다.

수옥헌은 화강석 기단에 벽돌로 축조된 지하 1층, 지상 2층의 르네상스식 건물이다.

1904년 덕수궁에 불이 나서 고종은 급히 함녕전에서 즉조당으로 피신한다.

다시 불길은 즉조당으로 옮겨 오고 고종은 다시 덕수궁 서문을 빠져 나와 수옥헌으로 피신한다.

이제 수옥헌은 고종의 집무실인 편전이자 외국사절 알현실이된다.

지금 덕수궁 서문인 평성문은 대한문과 함께 살아 남아있지만 굳게 잠겨 있다.

이유는... 미국대사관저 보안 때문에. 남의 나라에서 왕궁의 문을 잠그라고 요구한 것이다.

1906년 현판을 바꿔 달았다.

중명전.

해와 달이 함께 하늘에 있어 광명이 겹치듯이 군신이 각각 제자리를 지켜 직분을 다하는 전각.

대지 721평, 연건평 227평(1층 121평, 2층 106평)

건물 지하는 미로같이 복잡하고 밀실도 이어진다.

구석 벽면에 문이 나 있지만 벽돌로 막혀 있다.

고종 황제가 일본군이 쳐들어오면 러시아 공관으로 도망가려고 만든 지하터널의 문이다.


1905년 10월 27일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각료회의에서 결정한 조선보호권 확립을 위한 을사조약 시안 8개항을 갖고 서울로 출발한다.

11월 17일 조선과 일본의 을사조약 체결을 위한 군신회의가 중명전에서 열리고 회의장 밖은 총에 칼을 꽂고 완전무장한 일본군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고 5시간 동안 계속된 회의에서 누구도 찬성하지 않아 을사조약 체결은 거부된다.

이에 당황한 일본은 오전 12시 30분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들 다시 불러 회의 속개하여 이 심야회의에서 학부대신 이완용을 선두로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공상부대신 권중현 등 5명이 `가`라고 했던것이다.

1906년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에 일본 통감부를 개설하고 부임하기도 한다.

1906년 황태자와 윤비가 혼례를 올렸을 때 외국사신을 위한 초청 연회가 여기서 열렸고.

1907년 6월 고종은 이준, 이상설, 이위종 3명을 은밀히 중명전으로 불른다.

고종은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알릴것을 지시하며 친서를 전달한다.

1915년 일제가 덕수궁을 축소 훼손하면서 중명전을 경성구락부에 임대한다.

1919년 고종황제 함녕전에서 승하.

1920년 중명전 일대가 궁궐에서 제외되면서 환벽정을 비롯한 10여 개 전각 철거.

1931년 일제는 덕수궁을 유원지화하고 ‘중앙공원’이라 개명하게 된다.

1932년 석조전은 일본 고관 여관으로 사용된다.

1935년 3월 12일 일어난 화재로 중명전은 외벽만 남고 다 타버린 후 중건하여 해방 후에는 서울클럽이 되고.

1963년 11살 때 일본으로 인질로 잡혀간 영친왕이 이방자 여사와 영구귀국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영친왕 처소로 선물.

1976년 중명전은 경매로 넘어가고 개인에게 넘어가 일반 사무실 입주하고 고종황제의 안마당은 유료 주차장이 되었다.

1983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하게되었다.

1988년 어느 업체가 중명전 철거하려다 문화재청의 반대로 무산.

정동극장측에서 2002년 서울시가 ‘투자가치가 없다’며 중명전 매입을 철회하자 정부에 예산 신청하고

그래 49억에 중명전을 사들였다.

문화재라 투자가치가 없는 것.

정동극장은 문화관광부가 운영하는 극장이다.

2006년 문화재청으로 이관된다.

2011년 50억 투입해 뼈대 빼놓고 다시 지어 105년 만에 복원해 전시관 개관한다.

개관식에 고종황제의 증손녀인 이진이 참석했다.

도예가인 이진은 이석의 둘째딸로 장송모선생 문하에서 정통 도자기를 배운 수재다.

이석은 고종황제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의 11번째 아들로,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유일한 황손.

현판 중명전의 한자가 틀렸다.

중명전(重眀殿)현판의 ‘명’자는 눈밝을 명‘眀’자로 되어있다.

하지만 ‘眀’자는 현판의 글씨를 조화롭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 밝을 명‘明’자 대신 사용한 것으로 공식명칭은 안내판에 표기되어 있는 重明殿중명전이 맞다.

정관헌

등록문화재 제82호.

설계는 사바찐.

클래식 음악도 듣고 차도 마시고...

정면 7칸 측면 5칸의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지붕에는 동판을 이었으며, 외진에 두른 철제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박쥐 등 전통문양을 넣었다.

1900년 건립된 고종황제의 커피하우스.


우리나라에 커피가 처음으로 들어온 시기는 1890년.

1888년 개항지인 인천에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과 슈트워드호텔이 생겼고 커피를 파는 다방도 들어섰다.

대불호텔은 원조커피집이고.

공식문헌에 나타난 기록으로는 1896년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처음 커피를 마셨고 덕수궁으로 환궁한 뒤에도 그 맛을 잊지 못해 정관헌을 짓고 베토벤과 함께 커피를 즐겼다고 한다.  

영어 발음을 따서 커피를 ‘가배차’ 또는 ‘가비차’라고 했다.

서민들 사이에서는 「洋湯양탕국」으로 불렸고.

커피의 색이 검고 쓴맛이 나는 게 마치 한약 탕국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찐이라 부르는 이도 있었다. 고종+사바찐

그만큼 커피와 고종과의 인연은 각별했던것이다.

지금 스타벅스가 정관헌 후원하고 있다.


석조전.

일제가 덕수궁의 기를 죽이기 위해 1910년 만든 고종의 양식 숙소다.

수세식 화장실과 샤워기가 달린 목욕탕이 생겼다는 것.

설계자는 영국인 하딩.

1919년 고종이 승아하자 일본미술관이 되고.

1945년 해방이 되자 미소공동위원회가 사용하였고 전쟁이후 현대미술관이 된다.

1986년 과천으로 현대미술관 이사 가고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하다 최근 <대한제국역사관>으로 변신하였다.

덕수궁 정문의 원래 이름은 대안문(한양을 창대하게 만들겠다)

1906년 큰 하늘을 떠받들겠다는 의미로 대한문으로 고쳤다.

大漢대한은 소漢소한(하늘)과 雲漢운한(하늘)의 뜻을 취한 것.

황제는 天命천명을 받아 維新유신을 도모하여 법전인 中和殿중화전에 나아가시고, 다시 大漢正門대한정문을 세우셨다.

- 경운궁중건도감의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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