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번째. 한국전쟁 5/7 장기화되는 소모전
중국군의 개입은 12월 총퇴각으로 이어진다.
퇴각시 많은 북한 사람들이 미군과 함께 남으로 내려왔다.
이들 중 극히 일부는 과거 지주나 친일 관료 등 북한 체제에 불만을 품고 있던 자들로써 자의로 결정하여 월남하였으나 그러나 나머지 대다수는 퇴각 중이던 미군이 북한지역에 원폭 투하를 경고하는 선전물을 대량으로 살포하였기 때문에 원폭 투하에 대한 두려움으로 남쪽으로 피신하게 된 경우들이다.
이들 월남인들 대부분은 일시적인 안전을 위해 잠시 고향을 떤난 것이데 결국 휴전선에 가로 막혀 60여년이 넘은 오늘까지도 이산가족의 아픔을 간직한 채 인고의 세월을 살아가고 있다.
특히 미군은 북한 지역으로 부터 퇴각하면서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눈에 보이는 모든 생산 및 주거 시설들을 모조리 파괴하여 버린다.
반면 미국인 기자의 관찰에 의하면 북한군은 남쪽에서 퇴각할 때 별다른 파괴행위 없이 조용히 물러갔다고 한다.
중국군의 참전이 확실해 지고 미군의 패배가 계속되자 다급해진 미국의 Harry S. Truman 트루만 대통령은 한때 한국전에서 원자폭탄의 사용을 고려하였었고 그 권한을 늘 확전만을 주장해 온 맥아더에게 주었다.
그러나 미국의 원자폭탄 공격 계획에 대해 3 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우려한 동맹국인 영국을 포함한 서구 유럽국가들 조차도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고 세계의 모든 나라의 정부와 국민들이 한결같이 원자폭탄의 사용을 반대하며 강렬하게 미국을 비난하였다.
결국 미국은 국제적 고립이라는 정치적 위기 앞에 핵 무기 사용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12월 총퇴각 이후 패주만을 거듭하던 미군은 퇴각중 사망한 Walton Walker 워커(워커힐의 당사자)의 후임으로 Matthew B. Ridgway 리지웨이가 미8군 사령관으로 새로 부임하면서 새로운 전략을 세웠다.
리지웨이는 당시의 중국군과 북한군의 병력이 불과 174,000명인데 반해 미군은 한국군을 포함하여 두배가 넘는 365,000 명이었고, 군사장비나 화력면에서도 월등이 우세한 것을 확인하고 패주의 원인이 소위 인해전술이라는 북한군과 중국군의 교묘한 심리전에 농락당하여 계속 패배하며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리지웨이는 이같은 상황을 타개하고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하여 미군과 한국군의 몇몇 사단장급을 해임시키고 전선에서 이탈하거나 명령에 불복하여 후퇴를 하는 병사들에 대하여 즉결처분하는 강력한 조치를 발동하였다.
그리고 북한군과 중국군의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영토 확보를 위주로 하는 기존의 전투 형태에서 벗어나 상대편의 병력을 최대한 살상 시키는 보이고 움직이는 것은 다 죽여 버리는 '몰살작전'을 도입하여 운용하였다.
이런 미군의 몰살작전이 미미하지만 일정 부분 효과를 보았고 38선 이남 지역 깊숙히 진격한 북한군과 중국군은 38선 이북지역에서와 같은 민중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1951년 봄, 전세는 다시 역전되어 미군과 한국군은 3월 18일에는 서울을 다시 탈환하고 3월 22일에는 38 선 이남 지역 거의 모두를 탈환하였다.
이후 양측은 38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밀고 당기는 장기적인 소모전에 돌입한다.
미 공군의 잘못된 정보 또는 오판으로 인한 오폭으로 인하여 무고한 한국 민중들이 몰살을 당하고 많은 도시나 마을들이 잿더미로 변하기도 하였지만 여하튼 리지웨이의 '몰살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면서 패전의 살얼음판 위에서 궁지에 몰려있던 맥아더 또한 다시 살아나 '원대한 석권'을 향한 '교살작전' 즉 중국 본토의 봉쇄와 폭격을 주장하며 원자폭탄의 사용을 워싱턴에 계속하여 요구한다.
맥아더는 원자폭탄을 이용한 중국본토에 대한 직접공격이 설혹 소련과의 전쟁을 촉발시킨다 해도 북한군과 중국군은 물론 소련군까지도 쉽게 제압할 수 있다며 계속적으로 핵 폭탄의 사용과 중국 본토의 공격을 요구하였다.
이런 맥아더의 주장에 당황한 미국 정부는 맥아더를 해임시켜 버린다.
미국은 1950년 6월 개전 직후 부터 9월 말까지 불과 3개월 동안 한반도에 97,000 톤의 폭탄과 780만 갤론(2950만 리터)의 네이팜탄을 투하하였다.
이는 미국이 지난날 태평양전쟁에서 사용한 것보다 훨씬 많은 양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차별적인 미 공군기의 폭격은 인간의 생명에 관계된 공장, 학교, 도로, 교량, 댐, 병원 등 모든 것을 하나 남김 없이 다 파괴하여 버렸다.
진행중인 휴전회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의도로 자행된 1952년 1월 28일 부터 시작된 미국군의 세균전 (세균을 보균한 다량의 곤충을 북한과 중국의 화북 지방과 동북지방에 살포)은 미국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1952년 6월 오슬로에서 개최된 세계평화회의 집행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7인의 과학자로 구성된 국제과학조사단이 발족하여 7월 9일 부터 8월 6일까지 중국의 동북지방과 북한 지역을 조사하였고 조사단에 대한 미군의 공습 등 치졸하고 악랄한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국제과학조사단은 다음과 같은 최종결론을 내렸다.
본 조사단의 결론으로서 미 공군은 일본군이 제2차 대전 중에 장티푸스를 퍼뜨리기 위해 사용한 것과 정확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따라서 동 조사단의 의견으로는 장티푸스에 감염된 쥐가 비행기로 부터 낙하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국이 국제법상에도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반인륜적인 범죄행위인 세균전을 한국전쟁에서 자행했음이 세계적인 공식기구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한편 남한 전역에는 많은 유격대들이 조직되어 미군과 한국군의 후방을 교란하며 활발한 유격전을 계속하여 펼치고 있다.
특히 험준한 지리산 일대를 거점으로 하는 약 40,000여 명에 이르는 이현상의 지리산유격대는 순창, 정읍, 남원, 장성, 구례 등 호남 일대와 거창, 산청, 함양, 합천 등 매우 광범위한 지역에 걸처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일부 지역은 이른바 해방구로서 유격대가 실질적인 통치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자 1950년 10월 초 미군과 이승만 정부는 유격대의 토벌을 위해 새로이 육군 제11사단을 창설, 남원에 사단본부를 두고 본격적인 대규모 유격대 토벌작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유격대들은 험준한 산악지형을 이용하여 전세가 불리해 지면 깊은 산속으로 후퇴했다가 야간을 이용하여 기습공격을 펼침으로서 토벌군을 심각한 곤란에 빠뜨리곤 했다.
이리하여 어떤 지역에서는 낮에는 정부군이, 밤에는 유격대가 지배하는 양상이 되풀이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