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문 LVIII 419혁명 革命

무심히 지나가는 419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세대를 바라보며

by Architect Y

딸과의 대화에서 그저 단순히 일베를 따라 하는 모습에 관한 급우의 이야기를 들었다.

관심받기를 바라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세상의 미래를 바라보게 된다.

알기는 거부하며 눈에 띄기만을 바라는 마음은 암울한 내일이 투영된다.

헬조선을 부르짓는 20대가 있는가 하면 그저 道聽塗說 도청도설 하며 이슈가 되어 주기만을 기다리는 관종의 10대가 있다.

한번쯤 짚어보아도 좋을 이제는 옛 이야기가 아닌 역사가 되어버린 그 시절을 되새김질 해 본다.

이승만을 국부라 칭할수 없는 수 없이 많은 이유 중 하나인 사건.


419혁명의 도화선 315부정선거


야당후보에 대한 공갈, 협박, 매수, 선거운동 방해와 운동원들에 대한 폭력, 투표방해, 투표함을 통채로 바꿔치기, 농총지역에서의 이장주도 공개적 집단투표…

이런 엄청난 부정에도 불구하고 1958년 국회의원 투표 결과는 자유당의 뚜렷한 패배로 나타났다.

총투표수의 57.9%가 야당인 민주당에 투표하였다.

선거전 131석이던 자유당 의석은 126석으로 줄어 들었고 서울에서는 본래 자유당이 가지고 있던 의석 16개 중에서 15개가 민주당에 돌아갔다.

1958년 11월 자유당(이승만)은 지방자치법을 개정하여 시장과 지방공무원을 국민이 뽑는 대신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하는 법안과 국가보안법의 범위를 넓히고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 개정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유력 언론사들을 비롯한 야당 정치인과 민중들은 이승만 독재권력의 음모에 대하여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섰지만 1958 년 12월 24일 법 개정을 반대하는 야당의원들을 지하실에 감금한 채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말았다.


1959년 4월 30일 이승만 독재에 가장 비판적이던 경향신문을 강제 폐간시켜 버렸다.

경향신문을 폐간한 법적 근거는 대한민국 법령이 아닌 미군정 법령 88호였다.

신문과 정기간행물 허가에 관한 조항,

현 한국정세는 공명선거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무력에 의한 혁명이 일어날 전조를 보이고 있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일 3월15일
이승만 이기붕
조병옥 장면.jpg 조병옥 장면

자유당에서는 이승만과 이기붕이, 그리고 민주당에서는 미군정 당시 경무부장으로 악명을 떨쳤던 조병옥과 화려한 친일 경력의 장면이 각각 정 . 부통령 후보로 나섰다.

자유당은 이승만과 이기붕의 당선을 위하여 야당을 탄압하고 선거운동을 방해하며 유권자를 매수하고 깡패들을 고용하여 본격적인 부정선거 채비에 나섰다.

부정선거 책동에 항거하는 민중들의 투쟁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갔다.

이들은 민주당에 대한 지지 투쟁이라기 보다는 이승만 독재권력에 대한 항거였고 부정선거 음모를 분쇄키 위한 투쟁이었다.

2월 28일 대구에서의 학생시위를 시작으로

3월 5일에는 서울에서,

3월 8일에는 대전에서,

3월 10일에는 수원에서 격렬한 대규모 학생시위가 있었고

3월 12일과 투표 바로 전날인 14일 부산에서도 고등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1960년 2월 1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미 육군병원에서 뇌수술을 받던 중 사망는 사건이 발생한다.

조병옥 운구

조병옥의 사망으로 이승만은 쉽게 당선이 확보되었고 선거의 촛점과 관심은 이기붕과 장면의 부통령 선거로 모아졌다.

1956년 선거에서 이기붕에 압승한 바 있는 장면의 당선을 거의 확실시 하는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3월 15일, 이날 남한 전역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가공할 부정선거가 자유당에 의하여 자행되었다.

전국 각 투표소에는 경찰의 비상선이 쳐지고 대한반공청년단등 깡패들이 투표소 주변을 설쳐대며 공포스런 분위기를 연출하였으며 야당의 선거감시원은 쫒났고 투표를 끝낸 일반인들의 투표소 접근은 철저히 차단되었다.

대부분의 투표소는 폭력배들이 감시하는 가운데 공개적인 투표가 행해졌으며 그런 공갈 협박에 굴하지 않고 야당후보에게 던져진 표는 그자리에서 수거되어 버렸다.

더이상 선거가 아니었다.

투표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민중의 불만은 폭발하기 시작하였다.


3월 15일 경남 마산에서는 투표 부정을 보다 못한 학생들의 주도로 수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에 돌입하였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학생들과 시민들 15명 이상이 사살되고 수백 명이 다쳤다.

이 과정에서 고등학생이었던 김주열군이 미제 최루탄이 눈에 밖혀 사망하자 경찰은 김주열 군의 시신을 마산세관 앞바다에 던져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 소식은 자유당에의해 마산의 비극을 공산주의자들이 사주한 사건이라고 매도하였다.

어떤 투표함은 불타기도하고 몰래 바뀌기도 했으며 아예 무시되어 버린 것도 허다했다.

315 마산의거.jpg 315 마산의거

이 가운데 이승만이 총 투표의 97% 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기붕은 822만 587표를 얻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장면이 얻은 표는 고작 1,844,257표에 불과했다.


4월 11일 미제 최루탄이 눈에 밖힌 채 마산세관 앞바다에 던져져 바다에 표류하던 김주열 군의 시신이 발견된다.

순진한 소년의 주검을 목격한 마산 시민들과 학생들은 격분하여 모두 시내로 나왔다.

마산의 여고생들을 중심으로 한 15만여명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김주열 군의 살인범을 찾아 파출소를 습격하여 서류를 불태우고 마산 경찰서와 시청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자유당은 이런 마산시민의 격분에도 여전히 공산주의 사주 운운하는 작태만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김주열 군 시신 발견 기사
마산에서 시작되 전국으로 퍼져간 투쟁의 불길.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3,000 여 명이 3.15 부정선거의 무효를 외치며 재선거와 시위를 벌이다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끝내고 학교로 돌아가던 중 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많은 학생들이 부상당 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격분한 서울의 시민과 학생들은 대규모 투쟁에 돌입하기 시작하였다.

4월 19일 10만 이상의 시민들이 서울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동참하였다.

200여명의 무장 경찰대와 수 백명의 대한청년단 등 깡패들은 쇠뭉치, 자전거 체인, 못 밖은 몽둥이들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무차별 공격하였다.

그러나 시위대는 조금도 물러서거나 굴하지 않고 자유당 본부와 깡패 소굴인 대한청년단 본부, 어용신문인 서울신문과 서울방송국을 공격하였다.

미국 대사관이 시위대의 공격을 당하였고 원조라는 탈을 쓴 수탈기관인 미국의 원조기관이 습격을 당하였으며 곳곳에 있던 맥아더의 동상이 공격당 하여 파괴된 채 넘어졌다.

민중들의 대규모 항쟁에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 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오후 7시 이후의 야간통행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미국이 신임하는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이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어 육군 제15사단 전차대를 서울에 진주시켰다.

그러나 계엄령 하에서도 민중들의 항거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더욱 확산되고 격화되었다.

시위대들은 경무대를 향해 돌진하였고 잔악한 경찰들은 비무장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 사격을 자행하여 120명이 죽고 450명이 부상당 하였다.

419 혁명.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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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부산에서도 수만 명의 시위대들이 경찰서를 비롯하여 군청, 소방서, 대한반공청년단 지부 등을 습격하여 파괴하였고 10여 명이 경찰발포로 살해되고 80여 명이 부상당 하였다.

광주, 대구, 대전 등 전국 각 도시에서도 경찰서, 자유당 사무실과 반공청년단 사무실 등이 시위대의 습격을 받아 불타고 부서졌다.


혁명의 시작, 피의 화요일 1960년 4월19일.


경찰 측의 추정만으로도 사망자 183 명, 부상자 6,259 명에 달한다.

평화적 시위로 출발하였던 민중의 투쟁이 경찰의 무차별 발포 등 유혈적 탄압과 맞부딪치면서 급속히 민중봉기로 전환했다.

미국의 남한 지배와 그 전제조건인 反共 Ideologie가 항쟁의 과정 속에서 강력한 거부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슴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투쟁의 대열 또한 더욱 확대되어 급기야는 온건한 대학교수들까지도 최루탄으로 뒤덤벅이된 거리로 뛰쳐 나오게 되었다.

비록 조직화 되지 못했고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대한 전망을 갖추고 있지는 못했지만 민중들은 투쟁의 불길 속에서 무섭게 돌변하여 갔고 그럼으로 신속하게 굴종의식을 내던져 버리고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여 갔다.

결국 이승만 정권이 붕괴 직전에 도달하게 되고 민중의 공격이 단순히 이승만 도당에 머물지 않고 점차 미국을 향하게 되자 그동안 은밀하게 야당인 민주당과 타협을 모색하던 미국은 남한 민중들의 불만의 표적이 아직은 이승만에 한정돼 있슴을 재빨리 간파하고 표면에 들어난 불만의 표적인 이승만을 제거하기로 작정하였다.

Walter P. McConaughy w/ Ribbon
박정희와 송요찬

주한미군사령관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계엄사령관 송요찬에게 발포행위를 최대한 자제할 것을 명령하고 Walter P. McConaughy 매카나기 주한미대사는 이승만을 직접 찾아가 사임을 종용하였다.

미국의 원조에 그 숨줄을 겨우 연명해 독재자는 원조 중단의 위협을 내세운 미국의 사임요구를 거절할 용기도 없었다.

4월 26일 대통령 사임의사를 공식 발표하고 임시행정수반으로 미 대사관으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던 허정을 지명하였다.

허정은 이를 즉각 수락하고 과도정부를 수립하고 내각제로의 헌법개정과 공정한 선거의 실시를 약속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의 대통령 사임서가 국회에서 정식으로 수리되고 다음날 자유당의 2인자 로 군림하였던 이기붕 일가가 자살하면서 12년 이승만 독재는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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