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번째. 한국전쟁 6/7 휴전
전쟁이 무고한 민중의 목숨만을 앗아가는 가운데 무의미한 공방전을 계속하자, 미국의 핵무기 사용기도에 대해 결사적으로 저지하고 나섰던 아랍 여러 나라들과 인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등 비동맹운동을 주도하는 제3 세계국가들을 중심으로 한국전쟁의 휴전에 대한 요구가 빗발쳐 올랐다.
이런 상황 하에서 소련의 유엔 대표 Yakov Aleksandrovich Malik 말리크가 1951년 6월 24일 휴전을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미국 또한 중국 대륙으로의 확전 기도가 분쇄되고 미국 국내의 반전 압력에 봉착하여 소련이 제의한 휴전회담에 응하게 되었다.
오직 이승만 정권만이 기를 쓰고 휴전회담 개최에 반대하였으나 1951년 7월 10일 미국과 북한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휴전회담 본회의가 개최된다.
그러나 양측의 현저한 입장차이로 인하여 휴전회담은 아무런 성과없이 계속 지연되고 있었다.
특히 북한측이 제기한 모든 외국군대의 한국으로부터의 즉시 철수 제안은 미국측의 거부로 인하여 휴전회담의 최대 걸림돌이 되고 있던것.
휴전회담이 계속 난항을 거듭하자 보다 효과적인 휴전회담을 진행하기 위하여 1952년 2월 6일 북한측은 고급정치회의를 제안하여 미군측과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합의안을 도출하였다.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보장하기 위하여 쌍방 군 사령관은 쌍방의 관계 각국 정부에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을 발생한 후 3개월 내에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쌍방의 한 급 높은 정치회담을 소집하고 한국으로부터의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의 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건의한다.
이 합의안은 모든 외국군이 한반도로부터의 철수에 관해 원칙적인 합의를 한 것으로서 이후 미군의 계속적인 남한 주둔의 불법성을 제기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씩 하나씩 합의사항을 이끌어 왔던 휴전회담은 포로 교환 문제에 접어들면서 결정적인 난관에 봉착하였다.
본래 전쟁포로는 1949년에 수정 조인된 Geneva Agreements 제네바 협정에 따라 실질적인 적대행위가 끝나면 지체없이 석방, 송환하도록 되어 있다.
물론 미국도 이 협정에 조인한 나라중의 하나다.
그러나 미국은 제네바 협정에서 제시된 원칙에 벗어난 이른바 포로의 자유 교환을 주장하고 나왔다.
자신들도 조인한 제네바 협정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었던것이다.
미국측의 제네바 협정을 무시하는 포로 자유 교환 주장의 근거는 북한군 포로 111,754명 중 65,000명, 그리고 중국군 포로 20,720 명 중 5,000명만이 송환을 희망하고 있고, 나머지 북한군의 절반 가량과 중국군의 4분의 3이상이 자기땅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측의 주장은 전혀 객관적인 증거자료가 없어 확인할 수 없는 수치일 뿐이다.
한 예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1951년 말부터 계속터져 나오기 시작한 포로들의 항의 투쟁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미군측이 중국군과 북한군 포로들에게 본국으로의 귀환 포기를 강요하는 강압적인 심사를 계속하자 포로들이 격렬하게 저항하며 강압적인 심사에 대한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최초의 충돌은 1952년 2월 18일에 있었다.
포로들의 저항이 가장 강력했던 거제도 제62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이 미군의 강압적인 심사를 거부하자 미군이 발포하여 포로측에서 77명이 사망하고 140명이 부상했으며, 미군측에서도 1명이 사망하고 38명이 부상당했다.
3월 13일에는 한국군 경비대에 의하여 포로 12명이 죽고 26명이 부상당했다.
미군과 한국군의 포로에 대한 제네바 협정을 무시한 계속적인 학살 등 잔악 행위에 격분한 거제도 제76포로수용소 포로들이 1952년 5월 7일 수용소 소장 F.T.도드 준장을 납치 볼모로 삼고 피복, 식량, 약품, 기타 물자를 보급해 줄 것과 포로 송환을 위한 어떤 식의 강압적인 심사도 하지 말 것, 그리고 그동안의 잔악행위 등에 대한 시인과 사과할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도드 준장은 미국의 잔학행위를 인정하고 나서야 석방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도드 준방을 포로수용소 소장직에서 해임시켜 버리고 포로들에 대한 강압적인 심사를 재개하고 잔악행위를 계속하였다.
이에 포로들이 강력하게 거부하고 반대투쟁을 벌이자 6월 13일 또다시 거제도 제76수용소에서 미군의 총격에 의해 포로 38명이 살해되고 195명이 부상당했으며, 10월 1일에는 중국군 포로수용소에서 중국군 56명이 살해되고 120여 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12월 4일에는 봉암도 수용소에서도 포로 87명이 사망하고 115명이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이렇듯 미국측의 포로 자유 교환 주장은 포로들의 자유 의사라는 미국측의 주장과는 달리 미군의 회유와 협박 그리고 강압에 의한 것 일뿐 포로들의 자유 의사와는 전혀 무관한 미국측의 휴전회담을 지연시키기 위한 기만적인 술책에 불과했다.
결국 1952년 6월 22일 휴전회담에 참석 중인 미군측 대표가 일방적으로 퇴장해 버림으써 휴전회담은 1차 결렬되고 말았다.
회담이 결렬되자 미군은 북한에 대한 폭격을 한층 강화하여 겨우 복구된 발전시설의 90% 이상을 파괴해 버렸다.
이와 함께 북한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지배하고 있는 유엔을 앞세워 1952 년 12월 3일 미국이 내세운 포로 자유교환을 요지로 하는 유엔 결의안을 채택하게 하였다.
미국의 농간으로 지지부진 하게 된 휴전회담에 대하여 미국의 동맹국들 조차도 북한측을 옹호하며 제네바 협정에 따른 휴전회담의 재개를 미국측에 강력히 요구하기 시작하였고 미국의 국내 여론 또한 조속한 휴전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런 가운데 1952년 미 대통령 선거에서 한국전쟁의 조속한 휴전을 공약으로 내건 Dwight Eisenhower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이에 당황한 이승만은 온갖 관제 데모를 조작하여 북진 돌격을 주장하고 어떠한 평화적 협상도 거부하였던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승만의 악랄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는 북한과의 휴전회담을 재개하였다.
국내외적 압력에 쫒긴 미국은 보다 유리한 조건 하에서 휴전협정을 타결키 위하여 북한 지역에 대한 미 공군의 폭격을 한층 강화시키고 중국에 대한 원폭 투하를 협박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위협과 오랜 전쟁 수행으로 야기되는 제반 곤란한 상황들을 견디기 어려워진 북한은 가장 큰 문제로 남아있던 포로교환 문제를 미국측의 제안을 수용함으로써 휴전회담은 타결 직전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러자 다급해진 이승만은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1953년 6월 18일 이른바 「반공포로석방」이라는 미명 하에 부산, 마산, 논산 등에 수용되어 있던 포로 25,000 명을 불법적으로 경찰의 손에 넘겨 주었다.
경찰의 손에 넘어간 이들 포로들은 행방이 묘연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북한 측의 탈취된 포로를 즉각 원상복귀 시키라는 강력한 항의와 함께 휴전회담은 결렬의 위기를 맞았으나 결국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미국의 해리슨 소장과 북한의 남일 중장은 서로 인사도 않은 채 곧바로 토의에 들어가 적대행위의 중지, 양군의 접촉선으로 하는 군사분계선의 설치, 비무장지대의 설치, 휴전 이후의 병력증강 방지, 외국군 철수와 통일방안 모색을 위한 관계국간의 정치회의 개최 등을 골자로 하는 휴전협정에 조인하였다.
휴전에 즈음한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의 분위기는 휴전협정 당시의 주한 미군사령관 클라크의 나는 미국에서 맨 처음으로 승리하지 못한 정전협정에 조인한 사령관 이라는 고백처럼 미국이 분명히 패배한 전쟁이었던것이다.
미국의 합동참모본부 의장인 오마 브래들리 장군은 한국전쟁을 20세기 외교 정책의 대실수라며 논평하였다.
솔직히 말한다면 한국전쟁은 커다란 군사적 재난이며 부적당한 장소에서 부적당한 때에 부적당한 적과 싸운 부적당한 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