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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Apr 26.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I 강원 청령포

아홉. 단종을 기리는 마을 寧越영월 淸泠浦청령포

淸泠浦 청령포

명승 제 50호.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산 67

5백여년 만에 복원된 단종 유배지.

1441년 현덕왕후 유일한 세손 낳고 숨을거두고

1452년 문종도 즉위 2년 만에 승하.

12살의 端宗단종(바른임금) 조선 제 6대 왕 즉위한다.


1453년 계유정난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사살하고 바로 아래 동생 안평대군 사형시키고

직접 영의정 등극한다.

단종은 3년 만에 왕에서 쫓겨나 창경궁으로 피신하고 정순왕후와 시간을 흘린다.

조선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이제 15살의 상왕부부가된 것이다.


1456년 사육신 역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간다.

전부 사형.

6째 동생 금성대군도 삭녕으로 유배 보낸다.

계기로 단종을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시키고 강원도로 유배 보낸다.


1457년 6월 유배길.

창경궁을 출발한 단종은 마지막으로 청룡사의 雨花樓우화루(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누마루)에 정순왕후와 마주 앉았다.

이제 단종 17살.

단종비 18살.

단종이 청계천을 건넌다.

정순왕후는 단숨에 청룡사 뒷산의 東望峰동망봉(동쪽에 계신 지아비를 그리워하는 봉우리)에 올랐다.

호송대장 의금부도사 왕방연과 500명 군인들은 삼엄하게 호송한다.

1주일 만에 태백산맥을 넘었다.

오지 강원도 영월현감이 백리 밖까지 영접을 나왔다.

나룻배를 타고 서강을 건너 청령포에 안치된다.

3면이 물로 에워싸인 완전 감옥.

울창한 소나무숲속 초가집에 짐을 풀었다.  


단종을 유배지에 두고 태백산맥을 오르던 왕방연은 달밤에 시를 읊는다.


千里遠遠道 美人難別秋 천리원원도 미인난별추  

此心無所着 下馬臨川流 차심무소착 하마림천류  

流川亦如我 鳴咽去不休 유천역여아 명열거불휴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임을 이별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아 있습니다

저 물도 내 마음 같아서 울며 밤길 가는구나


영월 관풍정의 왕방연 시조비


생육신(金時習김시습, 元昊원호, 李孟專이맹전, 趙旅조려, 成聃壽성담수, 南孝溫남효온) 漁溪어계 趙旅조려는

태백산맥을 넘어 영월로 달렸다.

청령포 도착하고 무릎을 꿇는다.

단종은 17살.

조려는 36살.

폐위된 단종을 만나면 3족을 멸한다고 해도 조려는 영월을 네번이나 찾아간다.


그해 8월 홍수가 나서 청령포가 물에 잠겼고 영월 현감이 영월 객사로 옮긴다.

객사의 누마루인 매죽루에 오른 단종은 피를 토하면서 시를 읊는다.


원통한 새가 되어 궁궐을 나온 후로 외로운 그림자 산중에 홀로 섰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못 이루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어라

두견새 소리 그치고 조각달은 밝은데 피눈물 흘러서 지는 꽃이 붉구나

하늘도 저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어찌 시름 젖은 내게만 들이는고...


子規詩 자규시 (피를 토하면서 구슬피 우는 소쩍새의 시)


一自寃禽出帝宮 일자원금출제궁 孤身隻影碧山中 고신척영벽산중

假眠夜夜眠無假 가면야야면무가窮恨年年恨不窮 궁한년년한불궁

聲斷曉岑殘月白 성단효잠잔월백血流春谷落花紅 혈류춘곡낙화홍

天聾尙未聞哀訴 천롱상미문애소何奈愁人耳獨聽 하내수인이독청  


그래 현판이 다시 걸린다.

영월군수 申權近신권근이 창건하여 梅竹樓매죽루라고 부르던 건물을 子規樓자규루로...  

1457년 유배지 순흥에서 금성대군 역쿠데타 모의했으나 실패로 돌아가 금성대군은 사형 당하고 魯山君노산군(단종)에게 사약을 내린다.

왕방연은 영월 관풍헌 문밖 도착했지만 차마 사약을 올릴 수는 없고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린다.

魯山君노산군은 객사의 우측 방에서 밧줄을 목에 걸고 스스로 숨을 끊는다.

17살.

영월 관풍헌
자규루

시신을 강가에 갖다 버리고 시신 만지는 자는 3족을 멸하겠다는 명을 내린다.

한양에 돌아 온 왕방연 사직한다.

걸리면 3족을 멸하는데도 영월의 호장(지금의 면장) 嚴興道엄흥도 시신 수습 선산인 동을지산에 암매장한다.

물론 사직.

集賢殿直提學 집현전직제학으로 있다 사직하고 원주에 은거하던 생육신 觀瀾관란(물결을 바라보겠다)元昊원호가 영월을 찾았다.

엄흥도와 3년 侍墓시묘(성분成墳한 다음, 그 서쪽에 여막廬幕을 짓고 상주가 3년 동안 사는 일)

漁溪어계 趙旅조려도 동참한다.

定順王后 정순왕후(영조의 계비는 貞純王后정순왕후)는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속세를 떠난다.

법명 虛鏡허경(빈 거울).

정순왕후는 아침저녁으로 東望峰동망봉에 올라 먼저 떠나간 영월 지아비의 극락왕생을 빈다.

동네 아낙네들이 푸성귀 팔아 청룡사에 시주하여 후일 여인 채소시장이 된다.

1521년 82살로 정순왕후도 떠나 남양주시 진건면 思陵사릉에 모신다.

남양주 사릉

지아비의 무덤이 어딘지 알 수도 없고…

1541년 駱村낙촌 朴忠元박충원이 영월군수 부임한다.

암매장된 단종의 유골 수습해 묘를 만들었다.

1698년 숙종은 단정하고 바르다는의미의 莊陵장릉이란 묘호를 내리고 단종 복권한다.

장릉

사적 제196호, 강원도 영월군 영월면 영흥 4리

40개의 왕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영월 莊陵장릉
영월 莊陵장릉

1771년 영조는 청룡사에 淨業院정업원(업이 정해진 사람이 사는 집)舊基구기(옛 터)라는 어필을 내리고 정순왕후를 기린다.

뒷면에는 ‘皇朝正德十六年 辛巳六月初四日後二百五十一年 辛卯九月初六日立 前後皆親書(황조정덕16년 신사6월초4일후251년 신묘9월초6일입 전후개친서)’라고 새겨져 있다.

또한 정순왕후가 매일 오르던 산봉우리에는 東望峯동망봉이란 세 글자를 암각으로 새겨 당시의 사실을 기렸다.

그러나 채석장이 되어 흔적이 없어지고 비각과 비석만이 청룡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정업원구기

시도유형문화재 제5호,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 산3.

청룡사 앞에 있다.


1967년부터 영월군은 매년 4월 단종문화제 개최.

2,000년 영월군수는 청령포에 단종어가를 복원하고 목선을 띄웠다.

청령포-광풍헌-장릉에 이르는 단종의 피끊는 답사코스가 되고 15,000의 영월 주민들이 단종을 잘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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