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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Apr 27.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II 경기 화석정

여덟. 임진강을 내려다 보는 화석정 花石亭

花石亭 화석정.

경기유형문화재 제61호.

고려 말  吉再길재가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었는데 사후 그를 추모하여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폐허가 되었다가

1443년 栗谷 李珥 율곡 이이의 5대조부 康平公 李明晨강평공 이명신이 정자를 세우고

1478년 증조부 李宜碩  이의석이 중수하였다.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명명하였다.

李珥이이.


호 栗谷율곡(밤나무 가득한 고향 계곡의 지명).

이이는 8세에 화석정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八歲賦詩 팔세부시


林亭秋已晩 騷客意無窮 임정추이만 소객의무궁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원수연천벽 상풍향일홍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산토고륜월 강함만리풍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 새홍하처거 성단모운중


숲속 정자에 가을 이미 늦으니, 시인의 시상은 끝이 없구나.           

먼 물줄기는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해빛 받아 붉도다.

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토해 내고, 강은 만리의 바람을 머금었도다.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소리가 저녁 구름 속에 끊어지도다

13세에 진사시 장원.

이후 29세에 정시과거에 합격할 때 까지 9번의 과거시험에서 연속 장원한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일본 침략에 대비하여 ‘십만양병설’ 주장을 주장했으나 조정은 동인이 점령 중이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서인의 영수 이율곡은  낙향한 후 이듬해인 1584년 숨을 거둔다.

이이는 틈나는 대로 화석정 기둥에 기름을 발라두게 하며 유언한다.


곧 임금님이 지나 갈 꺼다.

정자를 불태워 불을 밝혀라.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신립(申砬) 장군의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4월 30일 새벽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蒙塵몽진길에 나섰다.  

선조 일행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종일 걸었다.

임진강을 건너기 위해 율곡리 도착하지만 날은 어둡고 비는 쏟아져 앞을 확인 할 수 없다.  

선조의 피난길을 수행하던 이항복이 기름을 먹인 이 정자에 불을 지른다.

그 불빛의 도움을 받아 선조는 무사히 임진강을 건넜다.


임진왜란때 불 타 없어져 80여년간 터만 남아있는 것을 1673에 율곡선생의 증손 李厚地이후지, 李厚坊이후방이 다시 세웠으나 한국전쟁때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의 화석정은 1966년 파주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한 것으로 건축양식은 팔작지붕 겹처마에 初翼工초익공형태로 조선시대 양식을 따랐다.

건물의 정면 중앙에는 박정희 전대통령이 쓴 花石亭현판이 걸려 있으며,

내부 뒷면에는 율곡선생이 8세때 화석정에서 지었다는 八歲賦詩팔세부시 가 걸려있다.

건물의 정면에 걸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현판 花石亭 丙午四月 朴正熙
八歲賦詩팔세부시

2005년 파주시는 화석정 주변의 일본산 리기다소나무를 다 베어내고 율곡의 탄생설화에 맞게 999그루의 밤나무와 한 그루의 나도밤나무를 심었다.

밤나무에 대한 설화는 이렇다....


율곡의 부친 이원수가 한 주막에 여장을 풀었다.

“이번 길에 댁에서는 귀한 인물을 얻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환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원수는 주모에게 혹시 그 화를 막을 방도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주모가 이르기를 밤나무 1천 그루를 심으라는 것이었다.

이원수는 장차 태어날 아들 생각에 주모가 시키는 대로하였다.

몇 해가 흐른 뒤 험상궂은 중이 시주를 청하며 어린 율곡을 보자고 하였다.

이원수는 주모의 예언을 떠올리며 완강히 거절하였다.

중은 밤나무 1천 그루를 시주하면 아들을 데려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원수는 쾌히 승낙하고 뒤뜰에 심은 밤나무를 모두 시주하였다.

그러나 밤나무 한 그루가 모자랐다.

이원수가 사색이 돼 떨고 있는데 숲 속에서 나무 한 그루가 ‘나도밤나무!’하며 크게 소리쳤다.

그 외침을 들은 중은 호랑이로 변해 멀리 도망치고 말았다.


이 정자의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면 까마득히 펼쳐진 하늘 가운데 한양의 삼각산과 송도의 오관산이 머리카락만큼 조금 드러나는데 그 경치가 그토록 빼어났다고 한다.

율곡과 가까웠던 정철이 이곳을 스쳐 지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산이 서로 등졌지만 맥은 본래 한가지요,

물이 따로 흐르지만 근원은 하나로세.

화석이라 옛 정자에 사람은 아니 뵈니

석양이라 돌아가는 길 혼이 거듭 녹아나네.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산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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