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간 배워온 식민사관으로 뼈속 깊히 박힌 역사 버리기
이미 많이도 훼철된 역사를 바로잡기보다는 오히려 더욱심한 왜곡과 오류를 덧대는 국정교과서를 통해 우리의 후대들에게 무엇을 바라보라 해야할지 답답한 마음뿐이다.
올해 부터 시작된 국정교과서의 내용이란 상상 했던것 이상이었다.
지난 10월 국정감사 중 친일 논란을 빚은 교학사 교과서와 비슷한 기술태도와 5·16에 대한 우호적 서술 등 편향성을 가진다.
초등학교 國定敎科書 국정교과서의 수 많은 誤謬 오류들..
의병 대토벌 (? 93쪽),
의병을 소탕하고자 (? 94쪽),
쌀을 수출하는 (? 96쪽),
을사조약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이토 히로부미(? 95쪽)
; 국권을 침탈 당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피탈’ ‘박탈’ 등의 표현 대신 ‘을사조약·외교권 장악’ ‘법권 장악’ ‘경찰권 장악’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16년간 배워온 식민사관으로 뼈속 깊히 박힌 역사 버리기
朝鮮史編修會 조선 편수회 라는 말을 들어 본 일이 있을것이다.
조선의 상고사가 망가진 가장 큰 계기가 이것일 것이다.
일본민족의 기원을 밝히면서 일본이 외국(한반도)을 거쳐 일본에 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직접 일본열도로 왔다 (천손민족 주장)
- 구로이타 가쓰미
한민족의 민족성(민족이라는 개념을 부정하고 지역으로 축소)을 약화 시키고, 일제의 만주침략의 발판을 마련.(만선사관)- 이나바 이와키치
고구려사 -발해(대진국)사를 중국사로 인식하고, 한국사는 신라 중심의 역사로 기록함. 한민족 7천 년 상고사가 송두째 없어짐.- 이마니시 류
1910년 11월부터 불과 14개월만에 51종 20여만권의 사서가 불태워 졌다
- 軍國日本 朝鮮占領36年史
이 후 1919년 3.1민중혁명으로 사임한 2대 조선총독 하세가와의 뒤를 이어 부임한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는 문화통치에 힘쓰게 된다.
1921년 12월 조선총독부 훈령 제64호를 발령하여 「조선사편찬위원회」를 만들어 우리 역사를 본격적으로 말살했다.
1925년 조선사편수회관제를 공포하여 위원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독립관청인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게 된다.
- 사이토 마코토(왼쪽) 조선역사편수회의 사료(오른쪽)
회장은 정무총감이 겸임했으며, 고문에 조선인은 이완용·박영효·권중현과 일본인은 쿠로이타·핫도리·나이토가 선임되었고, 위원에 이마니시·오다·이능화·어윤적 등이, 수사관에 이나바·홍희·후지타 등 3명이 임명되었다.
이후 이병도·신석호 등이 수사관으로 참여했으며, 최남선도 1928년 12월 촉탁위원으로 참여했다.
국조 단군이 곰의 신화로 조작되어 단군조선이라는 나라는 사라지게 되어 그 이전의 5천년 역사도 함께 잘려나가게 되고 조선왕조가 강조했던 기자조선보다는 위만조선을 강력하게 조명하게 된다.
요·금·청의 역사뿐만 아니라 발해사도 우리 역사에서 빠지게 되며, 고구리·백제·신라의 초기 기록들이 모두 변조되기에 이른다.
아울러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를 한반도로 가두는 반도사관이 확실하게 이론적으로 정착되는 것이다.
해방과 함께 역사학계는 친일 학자를 강단서 쫒아내고 식민사관의 뿌리를 근절해야 했었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무산되고 박은식, 신채호 선생에 이어 민족주의 사학자인 안재홍, 정인보 선생이 떠나면서 그 공백을 친일학자들이 채우게 된다.
조선사편수회에서 맹활약한 이병도와 신석호는 각각 서울대, 고려대 교수로 들어가 제자를 양성하게되고 강력한 식민사관으로 무장된 교육자들과 이승만대통령의 어설픈 토지개혁으로 친일의 어마어마한 자금은 사학으로 흡수되었다.
여전히 뿌리가 강력히 내려진 식민사관, 반도사관의 서울대 학생들에 의해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역사책이 만들어지고 있고…
일본의 식민사관의 중요한 틀은 역사와 종교를 없애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현재의 종교라는 개념이 아니고, 종교는 우리 민족의 생활문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