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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Apr 30.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IV 서울 칠궁

스물. 일제 총독사저에 이어 청와대에 묻힌 七宮칠궁

세조의 潛邸잠저(승천전 용의거처, 왕위에 오르기 전이나 그 동안에 살던 집)였던 永禧殿영희전에는 서울 중부경찰서가,

인조와 효종의 잠저인 於義宮어의궁에는 롯데시네마 피카디리극장이,

선조와 인빈 김씨의 소생 정원군이 살고 인빈 김씨의 사당이었던 儲慶宮저경궁에는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이,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사당인 宣禧宮선희궁에는 국립서울농·맹학교가,

세종의 여덞번째 아들 무안대군의 궁가이자 세종대왕이 눈을 감은 安洞別宮안동별궁에는 풍문여고가 들어서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양은 조선의 도읍이다.

일제압제의 발에 눌리고 독재자들의 군화에 밟여도 서울의 근본은 조선에서 기인한다.

고려때도 남경이라고 부르고, 삼국시대에도 유사한 지역이 있지만 정확히 한양(4대문안)과는 차이가 있다.

서울은 신도시 강남과 구 한양이 존재한다.

그럼, 구 도심인 한양(최소 4대문 안)은 복원하고 지켜야 하지 않을까.

1724년 영조가 왕위에 오른 뒤, 무수리 출신으로 왕을 생산한 그의 생모 최 씨를 추념해 만든 사당인 毓祥宮육상궁이 있던 묘궁이다.

그 후 국운이 기울어진 1908년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왕 또는 추존왕의 생모를 모신 다섯 사당을 이곳에 옮겨 육궁이라 하였고, 1929년 영친왕의 생모인 엄 씨의 사당을 이곳에 옮겨 칠궁이라 하였다.

毓祥宮육상궁:

영조의 생모 淑嬪숙빈 최崔씨의 사당이다.

영조는 즉위하면서 생모인 최씨가 후궁 출신이었기 때문에 국가적인 奉祀봉사의 은전을 받지 못하게 되자 경복궁 후원에 사당을 짓고 직접 제사를 올렸다.

처음에는 淑嬪墓숙빈묘라 하였다가 그 후 육상묘로 이름을 바꾸면서 이곳에 영조의 화상을 봉안하고 육상궁으로 승격하였다.

숙빈 최씨는 폐비가 된 인현왕후를 받드는 과정에 숙종의 승은을 입어 연닝군(영조) 낳았다.

숙빈 최씨의 묘는 파주시 광탄면 昭寧園소령원에 묻혔다.


儲經宮저경궁:

광해군 때 서인들의 반정으로 임금이 된 인조의 할머니 仁嬪金氏 인빈 김씨 사당이다.

인빈 김씨는 14세 때 선조의 후궁이 되어 40여 년간 선조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인빈 김씨는 광해군 때 별세하여 남양주시 진접읍 順康園순강원에 묻혔다.


大嬪宮대빈궁:

경종의 어머니 禧嬪張氏 희빈 장씨의 사당이다.

장씨는 숙종의 사랑을 받아 왕자 윤(명종)을 낳았으며 노론의 반대를 물리치고 원자로 책봉됨에 따라 희빈에 올랐다.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인현왕후를 물리치고 왕비가 되었으며,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권되자 5년 만에 희빈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그 후 인현왕후를 저지했다는 탄핵을 받고 사사되었으나 玉山府大嬪 옥산부 대빈으로 추봉되어 서오능 대빈묘에 묻혔다.


延祜宮연호궁:

영조의 아들 효장세자의 어머니 靖嬪李氏 정빈 이씨의 사당이다.

영조는 원비였던 정성왕후에게서 원자를 기대하기 어렵게 되자 후궁인 정빈 이씨가 낳은 아들을 효장세자로 삼았다.

효장세자가 열 살 때 죽고 뒤를 이은 사도세자마저 희생(임오화변)되자 정조가 효장세자의 아들로 즉위하여 진종으로 추존하였다. 정빈 이씨의 묘는 파주시 광탄면 綏吉園수길원에 묻혔다.


宣禧宮선희궁:

정조의 할머니이며 사도세자의 어머니 映嬪李氏 영빈 이씨의 사당이다.

영비 이씨는 영조의 사랑을 받아 사도세자를 낳았으며 비통함속에서도 외아들 사도세자의 죽음(임오화변)을 의연하게 견뎌냈다.

영빈 이씨의 묘는 연세대학교 구내의 綏慶園수경원에 안장되었다가 고양시 서오능으로 옮겨 갔다. 영빈 이씨는 후궁 제일의 의식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義烈’이란 시호를 내려 종로구 신교동 국립농아학교 교정에 宣禧宮선희궁이란 이름으로 사당을 세웠다가 순종 때 이곳 육상궁으로 옮겼다.


景祐宮경우궁:

순조의 생모이며 정조의 후궁 綏嬪朴氏 수빈 박씨의 사당이다.

수빈 박씨는 정조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순조를 낳았으며, 의빈 성씨의 소생 문효세자의 뒤를 이어 왕세자에 책봉되어 11살의 나이에 즉위하게 되었다.

평소 성품이 온화하고 예절이 바르고 검소하여 賢嬪현빈이라 하였다.

수빈 박씨의 무덤은 남양주시 진접읍 徽慶園휘경원에 안장되었으며 종로구 계동(옛 휘문하교 터)에 景祐宮경우궁이란 이름으로 사당을 세웠다가 순종 때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

경우궁은 갑신정변 때 고종이 잠시 피신하기도 하였던 현장이었으나 지금은 그 자리에 현대빌딩이 들어서 있다.


德安宮덕안궁:

영친왕의 생모이자 고종의 후궁 純獻皇貴妃순헌황귀비의 사당이다.

귀비 엄씨는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으로 있던 중 승은을 입었으나 강제 출궁 당해 있다가 을미사변 후에 다시 입궁하여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그 후 영친왕을 낳아 귀인에 이어 순비로 책봉되었으며 다시 순헌황귀비의 칭호를 받았다.

귀비 엄씨는 일본에 인질로 끌려간 영친왕을 그리다 승하하여 동대문구 청량리 永徽園영휘원에 묻혔으며 지금의 조선일보 자리인 서부학당 자리에 사당을 짓고 德安宮안궁이라 하였다가 1929년에 칠궁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칠궁의 면적은 8천 7백평, 38동의 전각이 들어서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왜놈들은 칠궁에 맹학교를 차렸다.


고종의 다섯째 째 아들 의친왕은 <사동궁>에 살았다.

1960년 4.19혁명 후 의친왕의 부인인 김비가 떠돌이 생활을 끝내고 다섯째 아들 이수길이 모친을 모시고 칠궁에 살면서 사당을 지켰다.

1964년 의친왕비 김비 칠궁에서 별세한다.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침투사건 이후 칠궁의 관리권은 문화재청에서 청와대로 넘어 가고

1968년 경호상 이유로 칠궁 좌측 폭 15m, 길이 140m 칠궁 철거한다.

근근히 이석을 포함한 황실가족 30여 명이 칠궁에서 버텼지만,

1980년 전두환이 다 내쫓았다.

이수길 선생은 3일만에 피를 토하고 세상 떠난다.


2001년 11월24일 33년만에 일반에 개방된이래 2008년 청와대 정식 관람 코스에 포함된다.

청와대 관람 코스는 만남의 광장- 춘추관- 녹지원- 수궁터- 대정원- 영빈관- 칠궁- 분수대로 구성됐으며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

살벌한 관람이지만 청와대 관람 신청하고 따라가면 된다. 졸졸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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