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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Jun 13. 2016

일반인문 LXVIII 宗敎 종교 03 불교

; 자아성찰에서 성스러움의 Aura아우라로의 불교 1/4

중국인들은 자신의 문명과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하다. 

15∼16세기까지만 해도 중국문명의 수준은 세계 어느 문명권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편전쟁 이후 서구열강에 거듭 패배하면서도 그들의 과학기술문명은 인정했지만 서양문화에 대해서는 전혀 수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자존심을 꺾고 서양 문명과 문화 모두를 배우기 시작했다.


인도문명과 중국문명은 다 같이 세계 주요 문명권의 하나로서 그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인도와 중국 사이에는 황량한 사막과 험준한 산맥이 가로놓여 있어 서로 왕래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은 엄청난 열정을 지니고 거의 일방적으로 불교의 학습에 매달렸다. 

그 결과 인도의 문화와 사상은 중국문화와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붓다의 탄생지 룸비니 동산의 보리수

반면 중국의 문화와 사상이 인도에 미친 영향은 지극히 미미하다. 

이런 일방적인 교류가 진행되었던 것은 바로 불교 속에 중국의 사상에는 없던 새로운 요소, 바로 종교적 성스러움의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원래의 불교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 데 비해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원형이 크게 바뀌어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지금도 남방불교의 중요한 불교경전은 고대 인도어의 하나인 팔리어로 되어 있고 대부분의 승려들은 팔리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한문으로 번역된 불경을 보지 산스크리트 원전을 보지 않았다. 

번역되고 난 뒤에는 심지어 원전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도 있다. 

중국인들의 자기 문화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그만큼 관심을 두지 않는다. 

중국인들은 여기에 인도에는 없던 새로운 불교를 창조하기도 했다. 

그것이 禪宗선종이다. 

중국적인 특색이 강해 많은 학자들이 선종은 불교 중국화의 종점이라고 말한다.  

불교는 인도의 석가모니가 창시한 종교다. 

석가모니라는 말은 शाक्य, Śākya 샤카족, 한자 음역으로는 석가족의 성자라는 뜻이고, 원래 성은 Gautama:瞿曇 고타마 이름은 Siddhārtha:悉達多 싯다르타(BC 563~483)다. 

그의 활동 시기는 중국의 춘추시대 말기다.


중국은 BCE 11를 전후로 은나라에서 주나라로 넘어가면서 종교적, 무속적 사회시스템에서 예와 악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시스템으로 전환했다. 

이에 비해 인도는 대략 비슷한 시기에 신들에 대한 찬미와 제사에 관한 문헌인 Veda 베다라는 경전을 중심으로 ब्राह्मणवाद Brahman브라만교를 확립했다. 

Brahmanism 婆羅門敎

Brahmanism 婆羅門敎 브라만교는 아리안족이 인도에 침입하여 원주민을 정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면서 건립했던 종교이자, 자신들이 믿던 여러 신들에 대한 신앙과 희생제의를 중시하고 신에 의해 결정된 caste카스트제도라고 하는 신분제도를 강요하는 정복자의 종교다. 

그런데 중국과 마찬가지로 BCE 5∼6에 이르러 사회 경제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나고 낡은 종교인 브라만교로는 이런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자 새로운 사상운동이 일어났다. 

공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중국의 사상가들이 천하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던 데 비해 석가모니를 비롯한 대부분의 인도의 사상가들은 어떻게 하면 존재의 근원적 고통을 해결하고 해탈에 이를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이는 사회 문화적 코드의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준다. 

caste

중국에서는 오래 전에 이미 예 시스템이 중요한 사회 문화적 코드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춘추전국시대의 수많은 사상가들이 예 범주 안에서 새로운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사상을 전개했다. 

이에 비해 인도에서는 종교가 사회 문화의 가장 중요한 코드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사상운동에서도 어떻게 하면 낡은 종교인 브라만교를 개혁하여 새로운 사회로 통합할 수 있는 종교를 만들어낼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이들 새로운 사상가들은 대부분 출가 사문운동에서 나왔다. 

기존의 브라만교에서 사제직은 대부분 결혼을 통해 세습되었는데, 당시 세습사제들은 대대로 물려받은 제례의식을 형식적으로 진행할 뿐, 문명의 발달로 인해 새롭게 나타난 여러 가지 사회 문제와 그 속에서 제기되는 종교적 의문 등에 대한 답을 줄 수 없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출가운동을 통해 깊은 명상과 고행을 하며 우주와 고통의 근원에 대해 탐구했다. 

석가모니 또한 그런 출가사문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석가모니가 태어날 때 왕궁에 초대받은 Astāvakragītā아시타라는 도인은 태어난 석가가 장차 천하를 다스리는 위대한 성왕이 되거나 또는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적 해탈을 전해주는 붓다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거나 또는'이라는 말은 제정분리가 된 당시 인도사회에서 종교적 성자와 정치적 성왕은 동시에 성취될 수 없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석가모니는 아들이 성왕이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도 뿌리치고 아리따운 아내의 섬섬옥수와 어린 아들의 천진난만한 미소도 뿌리치고 오직 존재의 근원적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출가를 단행했다. 

그가 아들의 이름을 장애물이라는 뜻의 rāhula라훌라로 지은 것은 출가를 앞두고 혈육에 대한 정 때문에 얼마나 괴로워했던가를 잘 말해준다. 

석가모니가 왕의 길을 포기하고 출가의 길을 걸었던 것은 당시 인도사회에서는 종교가 정치보다 더욱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석가모니는 6년의 출가 기간 동안 여러 형태의 명상과 금욕, 나아가 단식이라는 극단적인 고행도 실천했으며, 최후에는 독자적인 명상을 통해서 마침내 붓다, 즉 깨달은 자가 된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브라만교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모든 행위는 그 결과로 고통과 쾌락을 낳는다는 업보사상과 모든 존재는 그 업보에 따라 끝없이 생사윤회한다는 윤회사상은 베다의 일부분인 Uphanishad우파니샤드에서 나타나는 사상이다. 

그리고 해탈을 위해 명상을 중시하는 것 또한 브라만교와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다. 

우파니샤드에는 명상을 통해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그 핵심 사상 가운데 하나인 梵我一如범아일여사상은 우주의 근원이자 창조주며 궁극적 실재인 梵브라만과 개체의 내면에 존재하는 궁극적 실재인 眞我아트만이 하나임을 주장하는 사상이다. 

그 의의는 외부의 신에 대한 기도와 희생제의가 아니라 고요한 곳에 앉아서 깊은 명상을 통해 내면의 아트만을 알게 되면 궁극적 자유에 이를 수 있음을 강조했다는 데 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여러가지 점에서 브라만교와는 다른 독창적인 면이 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초월적인 신의 존재를 부정했고 고통의 원인과 해결을 신에게서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서 추구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인도를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모든 것을 신 중심으로 생각하고 신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브라만교의 가장 심오한 사상인 범아일여 사상 역시 브라만이라는 최고의 신이자 우주의 궁극적 존재를 전제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아예 신을 거론하지 않고 인간이 스스로 깨달음을 통해 해탈에 이를 수 있음을 강조했다. 

우주의 궁극적 실재에 대한 개념을 부정한 것도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석가모니는 緣起說연기설을 통해 모든 것은 인연화합으로 형성된 것이지 독립된 실체는 없다는 것을 주장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카스트제도를 부정하고 인간의 평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브라만교에서 카스트제도는 신이 만든 것이다. 

베다에 따르면 신은 입에서 최고의 계급이자 종교를 담당하는 브라만 계급을, 허리에서 정치와 전쟁을 담당하는 크샤트리아 계급을, 무릎에서 생산을 담당하는 바이샤 계급을, 발바닥에서 노예계층인 수드라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기 때문에 카스트제도를 부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당시의 사회통념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이어서 거센 저항도 있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이를 과감하게 시행했다. 

이런 점들은 불교가 인도인들의 민족종교라는 차원을 넘어서 세계종교로 도약할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그가 살아 있을 때 상당히 많은 지지를 얻었지만 인도의 전 지역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인도 최초의 통일왕국인 마우리아왕조의 제3대 왕인 Ashoka the Great아소카왕(BCE 304 ~ BCE 232)에 이르러 국가의 지배이념으로 채택된다. 

아소카왕에 의해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불교는 인도 전역은 물론이고 서쪽의 로마,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각국으로 전파되었고 그 뒤에 중국으로도 전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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