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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Aug 10. 2016

일반인문 LXXI 宗敎 종교 religion 03

; 자아성찰에서 성스러움의 Aura아우라로의 불교 4/4 마지막이야기

깨달음을 안으로 감추는 사상은 다른 종교나 신비주의적 전통에서는 찾기 어려운 독특한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다른 종교나 신비주의적 전통에서도 부분적으로는 깨달음을 감추고 범속함으로 돌아올 것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노자만큼 그렇게 비중 있게 강조하지는 않았다. 

이런 사상은 후대에 여러 분야에 영향을 끼친다. 

무술을 익히는 과정에서 사람은 몸에서 무인의 기운이 뻗치지만 무예가 진짜 무르익게 되면 무인의 기운이 사라지고 겉으로 보아서는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 등은 바로 이것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장의 영향을 받아 중국화된 불교라고 할 수 있는 선종의 깨달음에도 이러한 영향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선문답은 우리나라 조계종의 종정이었던 성철스님이 인용하여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하다.

靑原 청원 惟信禪師유신선사가 하루는 법당에 올라 다음과 같이 설법했다.


山是山 水是水 산시산 수시수  

山不是山 水不是水 산불시산 수불시수

山只是山 水只是水 산지시산 수지시수


내가 삼십 년 전 참선하기 전에는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보았다. 

그러다가 나중에 선지식을 親見친견하여 깨침에 들어서서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것으로 보았다. 

지금 휴식처를 얻고 나니 옛날과 마찬가지로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로 보인다. 

그대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 

이것을 가려내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같은 경지에 있음을 인정하겠노라.


세 가지 견해(단계)


첫 번째는 참선을 시작하기 전으로서 보통 사람들의 견해다. 

선의 전문용어로 설명하면 착각과 미망의 세계로 우리는 산을 산으로 보고 물을 물로 본다. 

그리고 우리는 당연히 이 세계가 우리가 보는 그대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으나 우리가 실재한다고 믿는 이 세계는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인식 주체와 객체의 대립에 의해 형성된 인식의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

감각이란 집단적인 착각일 수도 있다. 

우리 인류와는 의식 수준이 다른 존재는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唯識佛敎유식불교에서는 우리 인간에게는 물로 비치는 것이 물고기에게는 우리의 공기처럼 보이고, 지옥계의 중생들에게는 고름으로, 천상계의 존재들에게는 수정으로 보인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을 一水四見일수사견이라고 한다. 

한 가지 물을 네 가지로 본다는 뜻이다.(천사는 주옥으로, 인간은 마시는 물로, 악마는 피로, 물고기는 집으로 본다)

우리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보는 것은 절대 객관의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가 공유하는 집단 주관일 뿐이다. 집단의 규모가 워낙 커서 마치 객관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다. 

이 정도면 인식의 표상에 불과한 것을 실재라고 믿는 것이 착각이고 미망이라는 주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한참 참선에 몰두하여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단계다. 

그것은 착각과 미망이 모두 사라진 寂滅적멸의 세계다. 

참선을 통해 주체와 객체의 대립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 때 주체도 객체도 모두 사라진 세계가 드러난다. 

그것을 般若心經반야심경에서는 空공이라고 했다. 

그것은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으로도 감지할 수 없고 관념과 사유로도 알 수 없는 세계다. 

모든 감각과 지각 작용이 사라졌을 때 나타나는 세계다. 

그것은 모든 착각과 미망이 사라진 절대 적멸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적멸의 세계에서는 당연히 산은 산이 아니고 물도 물이 아니다.

마지막은 휴식처라고 했는데, 이것은 깨달음이 원숙해져 궁극적인 경지에 이른 단계를 말한다. 

寂照적조의 세계라고 한다. 


적멸의 경지가 선의 최종 단계는 아니다. 

선에서는 적멸의 경지 다음으로 적조의 경지를 제시한다. 

여기서 적조의 세계란 모든 미망이 사라진 적멸의 세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시 현상계를 있는 그대로 비추어보는 단계다. 즉, 적멸을 거친 뒤에 다시 원래대로 사물을 비추어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산은 다만 산으로, 물은 다만 물로 보이게 된다.

이 세 단계의 과정이 노자의 그것과 유사한 논리구조를 지니고 있다. 

처음의 미망의 단계는 수도하기 이전의 평범한 일상의 세계다. 

그러나 수도를 통해 도를 깨치면 평범한 일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초월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그 세계는 일상의 착각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다. 

그러나 진정한 깨달음을 얻으려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시 평범한 세계로 돌아와야 한다. 

다시 돌아온 그 세계는 겉으로는 처음의 범속한 단계와 다름이 없다. 

그러나 속으로는 처음의 단계와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이것은 바로 나선형적인 회귀를 의미한다. 


선종의 여러 종파 가운데 하나인 雲門宗운문종에는 유명한 雲門三句운문삼구가 있다. 

涵蓋乾坤함개건곤 (하늘과 땅을 끌어안고 덮는다)

截斷衆流절단줄류 (뭇 흐름을 끊어버린다)

隨波逐浪수파축랑 (물결 따라 쫓아간다)

선종에서는 추상적인 용어로 설명하기보다는 이렇게 구체적인 이미지를 들어서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선종이 노자의 사상을 받아들인 예를 들어보자면 불교의 깨달음의 본질은 이적이 아니기에 선종의 선사들은 다른 어떤 종파보다 신비한 이적을 부정했다.

종교적 수도나 명상을 하게 되면 간혹 여러 가지 초자연현상이나 초능력이 나오기도 하는데 대부분의 종교나 명상의 세계에서는 이적을 중시하고 이적을 일으키게 되면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다. 

인도는 특히 그런 경향이 심해서 인도에서 형성된 불교의 경전 속에는 석가모니를 비롯한 여러 보살들의 이적이 많이 나온다. 

단순히 이적을 부정하는것이 아니라 종교적 성스러움을 극복하고 다시 평범함으로 돌아오는것이다.

성스러움은 종교적 권위의 원천이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성스러움을 연출하기 위해 장엄한 사원과 종교적 상징물을 짓고 경건한 예배 의식을 거행한다. 

불교 또한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종파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사찰을 짓고 화려한 불상을 만들며 엄숙한 법회를 열었다. 

그러나 선종은 불교의 다른 어떤 종파보다 성스러움의 굴레에서 많이 벗어나 선방에는 번쩍거리는 금불상을 두지 않았고 복잡하고 장엄한 예배 의식을 중시하지 않았다. 

단지 참선을 통해 스스로 불성을 깨치는 것을 중시했는데 이런 특징은 바로 도교사상을 수용한 데서 나온 것이다.


일상성


선사들은 평상심을 강조했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으면 무언가 특별한 징후가 보일 것이라고 여기는 일반인들의 짐작을 무너뜨리고 깨달은 이후에도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삶을 영위했다. 


眞寂禪師진적선사가 처음으로 방장이 되었을 때 한 스님이 물었다. 

제가 듣건데 석가모니께서 설법을 시작하셨을 때는 황금빛 연꽃이 땅에서 솟아나왔다고 합니다. 

오늘 스님께서 취임하시는 마당에 무슨 상서로운 조짐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진적선사가 말했다. 

문 앞에 눈을 쓸었네.

깨달은 사람에게서 신비한 이적이나 조짐을 기대하는 물음에 대해 진적선사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로써 답변했다

선가에서 흔히 쓰이는 말에 喫茶去끽다거(차나 마시고 가라)가 있다. 

깨달음이 무엇이냐는 진지한 질문에 답할 때 자주 사용하는 구절이다

선종에서의 깨달음은 바로 茶飯事다반사(일상생활에서 늘 접하는 평범하고 흔한 것)와 같은 것이었다. 

지극히 평범하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선가의 전통에는 대개 안거가 끝난 뒤에는 그 사이 얼마나 정진했는지 서로 점검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은 참선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농사지은 이야기와 밥 먹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가 열심히 수도했다고 칭찬한다. 

이것은 선에서 노동이나 식사 등의 일상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고 이런 것들은 모두 바로 노장사상을 새로운 차원에서 재해석한 것이며 이를 신비한 이적의 부정, 성스러움의 초극, 일상성의 중시 등 중국불교가 지니고 있는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중국불교의 발전은 당대에 활짝 피어난 선종에 이르러 정점에 이르렀고 그 뒤로는 점차 쇠퇴한다. 


송대에서는 불교 안에서 선종의 위상은 크게 높아져 다른 종파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점하게 된다. 

선의 사상은 물론 심미의식이나 생활양식도 일반 사대부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다. 송대의 유명한 화가들 가운데서도 선에 심취한 이들이 많이 있었으며 송대를 대표하는 문인인 蘇東坡소동파나 黃庭堅황정견 등은 실제로 선사들과 교류하면서 참선을 배워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소동파

그러나 사상계 전체를 보았을 때 송대는 오랫동안 불교에 눌려온 유학이 다시 흥성하는 시기고 불교로서는 쇠퇴해 가는 시기였다. 북송대까지 극성했던 선종은 남송대에 들어서는 매너리즘에 빠지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며 종교로서의 불교의 지위와 영향력은 어느 정도는 계속 유지될 수 있었지만 이전처럼 지식인들을 매혹시키는 사상적 추구의 대상은 되지 못했다.

몽골이 지배했던 원대에 이르러서는 종교적 성스러움을 강하게 발산하는 종파인 라마교가 흥성하고 전국에 라마교 사원이 건립되었다. 

라마교는 단순하고 평범하며 깨달음의 일상성을 강조하는 선종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화려하면서도 주술적이고 秘儀的비의적(비밀스러운 의식과 같은) 요소가 많아 유행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유학에 의해 밀려난 선종은 더욱 쇠퇴했다.

티벳의 포탈라궁

명대에 들어서는 라마교의 영향력은 사라졌지만 이번에는 유불도가 통합되는 분위기 속에서 불교의 고유성은 점차 흐려지고 중국적 불교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선종의 명맥 또한 갈수록 희미해졌다. 

청말 이후 서구화의 물결 속에 선종뿐만 아니라 불교 전체가 쇠퇴했고 특히 공산화와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더욱 급속도로 몰락하게 되었다.


개혁개방 이후 선종을 중국의 우수한 전통문화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는 젊은 학자들에 의해 선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많아졌으나

대부분 학문적 관점이나 문화적 관점에서의 접근에 그치고 있어 실제적인 수양의 관점에서 선종이나 참선을 접근하려는 움직임은 아직 미약한 편이다. 

실제 수행의 방면에서는 중국으로부터 선종을 전수받은 일본의 선사들에게 뒤늦게 참선을 배우고 있는 서양보다 오히려 낙후되어 있다. 

불교의 전래

다음에 이어서 유학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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