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rchitect Y Sep 16.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I 강원 모현사

열셋. 영월 慕賢祠모현사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무릉3리.

자연부락명, 톡실.


원호선생이 土室토실을 짓고 살던 곳이라서 토실이라고 불렀는데 세월이 흘러 톡실로 변했다.

지금도 마을 가운데는 원호선생을 추모하는 사당인 慕賢祠모현사가 있다.

조카인 판서 원효연이 수행하는 종들을 물리치고 문 밖에 와서 보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수양대군이 특별히 호조참의(지금의 기획재정부 차관)에 제수하여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강직.

원호(1396~1463)

본관은 원주(원주원씨의 시조는 당 태종이 고구려에 파견한 8학사 중 한명인 원경)

문과 급제자 63명과 상신 2명 배출.

호는 觀瀾관란.

맹자의 觀水有術 必觀其瀾 관수유술 필관기란(물을 관찰할 때는 반드시 물결을 보아야 한다)에서 따왔다.

1423년 문과 급제하여 문종 때 종3품 집현전직제학을 지냈다.

1453년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정권을 잡게 되자, 병을 핑계로 낙향.

1457년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자, 영월 서쪽에 집을 지어 이름을 觀瀾齋관란재라 하고 강가에 나가서 시가를 읊기도 하고 혹은 집에서 글을 짓기도 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멀리서 영월 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임금을 사모하였다.

원호가 단종이 유배된 영월의 청령포를 향하여 조석으로 눈물을 흘리며 문안을 드리던 곳으로 손수 가꾼 채소와 과일을 빈 박통에 넣고 물에 띄워 청령포로 보내어 단종께서 드시게 하였다.

나뭇잎에 글을 적어 함지박에 담아 단종에게 띄웠다.


간밤에 우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내여라

이제야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 물이 거슬러 흐르도록 나도 울어 보내리라


단종이 죽자 삼년상을 입었고, 삼년상을 마친 뒤 고향인 원주에 돌아와 문 밖을 나가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출입문과 사당 정면에 慕賢祠모현사 현판이 걸려 있으며, 출입문 앞에는 朝鮮忠臣觀瀾元先生神道碑 조선충신관란원선생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숙종이 조상들이 저지른 만행을 속죄하는 일에 앞장 선다.

1699년 숙종이 원호의 절의를 기리기 위하여 토굴을 파고 은거하던 장소에 延諡閣연시각이라는 사액 현판을 내렸다.

영월의 주천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은 주천리, 서쪽은 신일리다.

쌍섶다리는 예로부터 이 두 지역을 잇는 유일한 교량으로 쌍섶다리가 첫 선을 보인 때는 1699년.

숙종은 원주에 부임하는 강원 관찰사에게 영월 장릉(단종의 능)을 반드시 참배하게 했다.

원주에서 오는 관찰사 일행은 주천강을 건너야 했으나 사인교와 말 등, 그 일행은 일반 외섶다리로는 건널 수가 없어 주천 주민들은 주천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은 주천리, 서쪽은 신일리가 맡아서 다리 하나씩 놓기 경쟁을 벌이게 되어 양편 사람들이 남녀 노소 가릴 것 없이 총동원되었다.

관찰사 일행이 이곳에 도착하여 주민들이 환영하는 가운데 무사히 쌍섶다리를 건너 영월 장릉으로 향하였다. 수일 후, 관찰사는 장릉의 참배를 마치고 다시 돌아가는 길에 이곳 주천에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등 쌍섶다리 놓기에 수고한 백성들과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잔치를 베풀었다.

그 후로부터 민심은 정상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고, 이 쌍섶다리 놓기는 민속놀이로 전승되어 오고 있다.


1780년(정조 4) 10월에는 왕이 교지를 내려 貞簡公정간공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이후 고종 때 판서를 지낸 심상훈이 이곳에 왔다가 모현사라는 현판을 써서 달았다고 한다.

해마다 음력 3월 3일에 후손과 유림들이 원호의 충절을 기리는 亭祠정사를 지낸다.

1965년에 담장을 보수하였다.

건물규모는 솟을삼문 주위로 돌과 흙을 섞은 담을 두른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건축가의 주유천하 VI 충청 홍주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