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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Feb 13.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IV 서울 세검정

둘. 세검정, 피비린내로 진동한 거친 역사의 숨결

자하문길 터널을 북으로 지나면 홍지동(弘智門홍지문이 있어서) 사거리에 이르게 된다.

인왕산, 북한산, 북악산 줄기들이 모이는 계곡인데, 많은 역사 유적들이 자리 잡고 있다.

멀리 창의문에서부터 탕춘대(蕩春臺), 세검정, 총융청 자리, 조지서, 평창동 창고, 장의사 당간 지주, 연융대 등등.

전부 설명 하기는 그렇고  오늘은 세검정.

한성도성도 중 홍제천부분- 물길 윗쪽 세검정이 보인다

경복궁 서쪽길이 효자로고 그 옆길이  자하문로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경복고등학교 지나 자하문 터널을 지나고 상명대 앞이 세검정 삼거리.

여기서 우회전 하면 세검 1교와 만나고 그 다리를 지나면 바로 붉은 기둥을 한 ‘세검정’이 세워져 있다.  

소음과 매연에 갇혀 피곤한 듯 서 있는 세검정에서 거친 역사의 숨소리를 느낄 수 있다.

선조의 의인왕후가 아들을 못 낳는다.

후궁 공빈 김씨가 아들 둘 출하는데 임해군과 광해군.

뒤늦게 계비 인목왕후 영창대군 출산하여 적자지만 너무 늦었다.

서자 그것도 둘째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한다.

그래 북인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적자인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로 분당하게 된다.

이런 팽팽한 정치적 대립 속에 갑자기 선조 승하하게 되고 1608년 광해군 15대 왕에 오른다.

대북파의 영수 이이첨은 소북파 숙청한다.

이이첨은 전에 비운의 왕 광해에서 설명했다.

이이첨은 광해군 친형 임해군과 적자 8살 영창대군 모두 역모죄로 몰려 유배되어 사사(賜死)시킨다.

영창대군의 엄마 계모 인목대비 폐위도 주도하고.

그래 광해군은 폐륜아로 등극하게된다.


소북파와 대북파를 지켜보던 서인 이귀가 능양군을 찾았다.

능양군의 부친은 광해군의 배다른 동생인 정원군.

1623년 쿠데타세력이 弘濟홍제(널리 구제한다)院원(중국의 사신들이 성안에 들어오기 전에 임시로 머물던 여관)에 집결한다.

(1895년 철거되었죠)

능양군은 직접 쿠데타 세력을 이끌고 창의문 부수고 7천여 명 경복궁 공격하게되고 광해군은 내시 등에 업혀 의관 안국신 집으로 피신하지만 다음날 체포되어 강화도를 거쳐 제주도로 유배된다.

경호실장 이흥립이 반란군에 붙어버린탓.

쿠데타에 성공한 능양군과 이귀 등의 반란군은 혁명의 출구였던 창의문을 나와 세검정에서 피 묻은 칼을 냇물에 씻는다.

그래 이 정자는 洗劍亭세검정이 된다.

냇가 이름은 砂川사천(모래내; 물과 모래가 같이 흘러 내려오는 냇물. 그래 남가좌동을 모래내라 하죠)

물은 북한산의 남장대(북한산에 있는 3개의 군지휘소인 동장대, 북장대 남장대의 하나) 시작.

1941년 세검정 전소된걸 1977년 복원한다.

남장대에서 이 세검정에 이르는 물은 원래 옥처럼 맑았지만 해방 후 무차별적으로 영세민들이 집을 짓고 사는 바람에 완전 오물이된다.

종로구 신영동 168번지에 있는 이 정자는 서울시 기념물 제4호.


이 동네 이름이 세검이 아니고 신영인건 1750년 5군영(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은 수도 방위,총융청은 북한산성, 수어청은 남한산성 방어하는 외곽 군대)의 하나인 摠戎廳총융청이 이곳으로 이전 설치되면서 새로운 군영이 설치됐다고 해서 신영新營이 된 것이다.

겸재 정선의 세검정 수묵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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