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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jeong May 19. 2020

끝없는 모험만이 그대와 함께이길

모험은 행운이다 / 페퍼톤스 - 행운을 빌어요

며칠 전,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기대 없이 지원한 회사에 덜컥 서류 합격을 해버린 것이다. 감격스러운 첫 서류 합격이었다. 그런데 그 행복을 만끽하기는 커녕, 나는 말 그대로 멘붕이 되었다. 면접이 당장 내일이라니. 일주일 전 스팸 메일로 분류되어버린 합격 메일을 확인한 것은 오후 1시경 아르바이트 중인 대전의 한 카페 안이었고, 면접은 다음 날 오후 3시 장소는 서울 본사였다.


어쩌지. 아직 번듯한 첫 면접은 치뤄본 적도 없는 초짜 취준생인 내겐 너무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일단 해결해야할 문제가 많았다. 당장 내일 입을 멀쩡한 정장 한 벌이 없다. 아르바이트를 못하게 될텐데 대신 일을 해 줄 사람도 없다. 제일 큰 걱정은 인터뷰에 대한 준비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준비를 해야하나? 이런 저런 생각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한참 멘붕 상태로 머리를 쥐어 뜯다가 결국,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면접을 포기했다. 인사 담당자에게 불참 의사를 담은 메일을 회신하는데 아까워서 손이 떨렸다. 첫 면접 기회를 내 손으로 놓다니 내가 미쳤구나 싶었다. 메일 보내기 버튼을 누르고 나선 나에게 해주고 싶은 욕을 머릿속에 늘어놓으며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었다.




조금 다른 행운을 빌어요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누군가를 위해 부르는 노래, 페퍼톤스의 '행운을 빌어요'. 푸른 빛의 앨범 아트와 잘 어울리게 참 시원하고 청량한 노래다. 곡의 시작부터 계속 되는 경쾌한 비트와 한 글자 한 글자 짚어 부르는 맑은 보컬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청량감이다. 귀로 느껴지는 분위기를 한층 더하는 희망적인 가사들을 머릿 속으로 받아적다보면 (현실적으로든 비유적으로든) 당장 눈 앞에 멋진 길을 마주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 날도 기운을 내고 싶어서 침대에서 일어나 이 노래를 틀었다. 또박또박 들리던 가사가 더욱 잘 들렸다.


뒤돌아 서지마요 쉼없이 달려가요
노래가 멈추지 않도록
쉼없는 이야기 끝없는 모험만이 그대와 함께이길
행운을 빌어요


보통의 축복이나 응원은 '당신이 꽃길만 걷기'를 빈다. 꽃길처럼 아름답고 포근한 미래를 걷기를, 힘든 날은 잊고 앞으로 좋은 일만 생기기를. 그런데 이 노래는 조금 다른 행운을 빌어준다.


당신이 가는 길이 순탄하지 않기를 바란다. 좋고 나쁜 이야기들이 함께 하고, 울퉁불퉁 끝없는 모험들이 함께 하는 그런 미래를 빌어준다. 노래하는 이가 생각하는 행운은 모험이고, 모험은 행운이다. 모험이 있어야 약한 모습을 마주할 수 있고 그걸 이겨낼 강한 모습을 찾아낼 수 있고, 슬픔과 웃음의 감정을 느껴볼 수 있고, 굳은 딱지를 냈다가 새 살도 돋게 할 상처도 받아볼 수 있다. 내 추측이지만 노래하는 이는 그렇게 생각하고 이 노래를 썼을 것이다. 방금 전의 내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졌다.




다시 올 행운을 기다리며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면접을 포기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정장은 당장 가서 사면 그만이고, 아르바이트는 사장님께 빌어 하루 빠지면 그만이고, 면접이야 가서 시원하게 말아먹고 오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면접을 다녀왔다면 분명 나중에 써먹을 기억 하나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면접에 도전하지 않은 건 두려워서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실패할까 봐 두려워서 그랬다.


고등학생 때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의 기분을 잊지 못한다. 희망차고 경쾌했던 그 기분. 지금 이 노래를 듣는 난 눈부시지 않은 어른이 되어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었다. 두려워서 도전의 기회를 날려먹고 그냥 지금 걷고 있던 조금은 볼품없는 길이나 계속 마저 걷고 싶어하는 어른이 되어있었다.


그런 죄책감에 시달리는 나에게 이 노래는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나약하다고 질책하지 않고 빙빙 돌려 말해주었다. 미래는 모험이라는 행운으로 가득해서 가끔은 지게 될테지만 그건 두려워할 일들이 아니라고, 다음엔 꼭 그 행운에 도전해보자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조금은 기운을 내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앞으로는 두려운 처음들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다시 한번 다짐했다. 벌써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이 눈에 훤하다. 우당탕탕 넘어지고 창피하고 아파서 울다가, 길이 원망스럽고 그럴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길 위에 멍하니 서있는 것 보다는 멋진 모습이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오늘의 부끄러운 내 모습도 울퉁불퉁한 길에서 넘어진 모습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에게 행운을 빈다. 수많은 이야기 그리고 끝없는 모험이 나와 함께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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