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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사랑

 - 아름다운 사람들 1 화

 나의 어머니는 2015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메르스로 우리나라가 난리가 났던 그해 5월 16일에. 메르스의 첫 발병 환자가 삼성병원 응급실에 방문했던 17일.. 우리는 그 병원의 장례식장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시신을 모시고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다. 같은 병원의 응급실에서 한 국가를 비상사태로 몰고 갈 정도의 큰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전혀 모른 채...


 큰 지병이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영면에 우리 형제들은 모두 멘붕 상태였다. 멍한 상태에서 조문객들을 맞이하였고 누군가 쓰러지지 않을까 염려되는 상황이었다. 많은 친구들, 친지들, 직장 동료들이 찾아와 주어 그나마 우리들의 슬픔을 같이 위로해 주었기에 힘든 상황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서야 메르스 환자로 인한 비상사태가 바로 옆 건물 응급실에서 일어났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우리 가족 모두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 가족 중 누군가가 몸이 안 좋아져 그 응급실을 방문했더라면 어쩔 뻔했을지... 젊고 건강한 의료진도 죽음의 문턱까지 가게 만들었던 무서운 메르스로 인해 우리 가족들 중 또 다른 초상이 있을 수 있었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리고 조문 오신 친구나 동료 중 혹여 메르스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들려오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우리 집안의 초상이 아니었다면 그 날, 삼성 병원에 올 일이 없었을 테니..


 모든 메르스 사태가 잠잠해질 때까지 사실 나는 가슴을 졸이고 걱정을 했었다. 다행히 내가 염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살펴 주신 것으로 생각한다. 늘 사랑을 베풀어 주시던 나의 어머니...  내가 그나마 이렇게 내 일을 가지고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음은 모두 내 어머니 덕이라고 생각한다. 돌아가실 즈음에는 늘 통화 끝에 "사랑한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우리 형제를 키우실 때는 사랑이란 단어 한 번 쓰지 않으신, 어찌 보면 표현을 할 줄 모르셨던 어른이셨는데...    


 정형외과 환자분 중에 수술실에 가끔 들어오시는 40대 중반의 여자 환자로 정신지체로 인해 지능이 떨어지는 분이 계셨다. 정신 연령이 어린아이 수준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수술하는 질환은 연골의 암이었다. 이 암도 재발이 잘 되다 보니 여러 번 수술실에 입실하셨다.


 입실하실 때는 항상 아이들처럼 수술실 대기실까지 부모님께서 같이 입실하여야 했다. 그나마 수술실에 입실할 때는 다행히도 아가들처럼 분리불안 증세를 보이지 않아 울거나 크게 저항하지는 않으셨다. 그런데 수술이 끝나고 회복실에 나오면 어린 아가들처럼 어머니를 찾고 울고는 하셨다. 그래서 일반 성인 환자와는 다르게 늘 회복실에 어머니께서 미리 와 계시고 병실로 갈 때까지 같이 있으시곤 했다. 그러한 다 큰, 아니 오히려 늙어가는 딸을 어머니께서는 5살 아기에게 하듯 지극정성으로 예뻐하셨다. "에구... 우리 아가. 아파도 안 울고 착하다" 하시면서 연신 딸의 머리를 쓰다듬고 얼굴을 어루만져 주시는 할머니 연령의 어머니.


 그분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면 이런 질환이 아니더라도 키우고 살아가는데 삶에 애환이 참으로 많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이런 중병까지 앓고 있는 정신적으로 어린, 그러나 몸은 할머니의 배가 되는 딸을 간호하시기가 얼마나 힘드실까? 그분의 노고에 정말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그 할머니의 얼굴 어디에서도 딸에 대한 원망이나 미움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야말로 예쁘고 귀여운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길만이 있을 뿐이었다.     


 수술이 종료된 후에는 회복실을 통해 병실로 가는 환자분들이 대부분이지만 병실로 가지 못하고 수술 종료 후 중환자실로 바로 가서 중환자에게 필요한 집중 관리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이런 환자의 수술 후 예후는 병실로 가는 환자분들보다 대체적으로 좋지 않다.


 때에 따라서는 환자분을 마취에서 깨우지 않고 중환자실로 가는데 보통 폐 기능이 좋지 않거나 환자의 전신 상태가 매우 안 좋은 경우, 뇌수술을 받은 경우이다. 수술실에 들어올 때는 멀쩡히 의식도 있으셨는데 수술실에서 나올 때 의식이 없는 상태로 중환자실로 의료진들이 바로 다급히 모시고 가니 이 경우 환자분들의 가족들은 거의 패닉 상태로 쫒아 오신다.


 환자분을 중환자실로 모시고 가는 마취과 의사나 수술을 보조했던 인턴, 외과 전공의에게 가족들이 수술 후 집도의로부터 수술에 대한 설명을 미처 듣지 못한 경우, 수술에 대해 다급하게 물어보시는데 환자 이송으로 바쁜 의료진들이 이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할 여유가 없으니 가족들은 이 의료진들이 매정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린 자녀들이 수술받은 경우, 아이가 의식도 없고 입에는 호흡관을 꽂은 채 의료진들이 앰브백으로 산소를 투여하면서 중환자실로 이송할 때는 혼비백산하고 신발도 잃어버리고 쫒아 오시는 어머님들이 계신다. 울면서 쫒아 오시는 어머님, 아버님에게 우리는 뭐라고 라도 설명드리고 싶어 그냥 '수술이 잘 끝났다, 아이가 힘들어할 것 같아 잠깐 잠재운 것이다'라고 주로 말씀드린다. 그렇게라도 말씀드리면 조금은 안심하시는 것 같다.


 어르신들이 수술하고 중환자실에 갈 때 역시 자녀분들이나 배우자분들이 따라오시지만 그 순간 우시는 분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 환자분들의 어머니들은 99%가 우시니... 세상에서 누군가를 가장 사랑하는 분은 역시 어머니인 것 같다.     


 좀 더 오래된 기억이다. 어머님이 아니고 어떤 꼬마의 아버님에 대한 기억. 20 년 전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 이 병원에서 과장 발령 전 전임의 시절, 주말이었고 나는 논문 문제로 의국에 나와 있었고 그 당시 전공의였던 여자 선생님과 같이 의국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응급실에서 다급히 전화가 왔다. 5살 소아인데 기관 내 삽관을 해야 하니 마취과에서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전공의 선생님 혼자 내려가도 되었지만 노파심에 같이 응급실에 내려가 보았다. 


" 무슨 일이지요 “


" 5 살 남아인데 14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놀다가 떨어졌다고 합니다. 아이 SPO2 (말초 산소포화도, peripheral oxygen saturation)가 89%라서 기관 내 삽관을 해야 할 것 같아요. “


설명하는 인턴 선생님 옆에는 백지장 같이 하얗게 질린 아이의 아버지가 서 계셨다. 


 나는 그 전공의 선생님이 기관 내 삽관을 하는데 보조를 해 주고 삽관이 잘 되었는지 확인해 주었다. 그리고는 응급실 인턴 선생님이 앰브벡으로 호흡을 보조하면서 단층 컴퓨터 촬영실로 옮기는 것을 보고 의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응급실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이에요? 아까 그 꼬마 수술이라도 해야 하나요?" 


그 당시 우리 병원은 소아용 기계적 환기 장비가 없어 소아의 큰 수술은 불가능한 상황이라 대부분 대학 병원으로 이송하고 있었기에 우리는 인턴 선생님이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고 짜증이 나고 있었다. 


" 다름이 아니라 아까 그 꼬마 아버님이 ㅇㅇ 대학 병원으로 이송을 원하시는 데요.. 마취과 선생님들께서 꼭 같이 가 주셨으면 하고 바라셔서요. “


이건 무슨 말인지.. 마취과 선생님이 다른 병원에 환자를 이송한 적은 유사 이래로 없는 일이라 자초지종을 알고 보니 아까 CT실로 이송할 때 이송 카 산소통에 산소가 떨어진 걸 모르고 가다가 아기의 산소 포화도가 더 떨어지면서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그래서 아기의 아버님께서 대학 병원으로 가고 싶다고 의사를 표현하셨고 어차피 아기는 대학 병원으로 이송할 케이스여서 그러하기로 정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아버님께서 지금까지 쭉 보니 그래도 제일 믿음 가던 의사가 아까 기관 내 삽관해 주던 마취과 선생님 두 분이시라며 꼭 좀 아이를 이송하는 앰뷸런스에 같이 가주십사 부탁하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아이도 없었던 시절이라 부모님의 마음에 대해 이해가 부족했던 시절이어서 그분의 부탁이 귀찮았다. 그런데 그 여자 전공의 선생님께서는 고만한 아들이 있었던 터인지 아님 나보다 속이 깊은 분이셨는지 나보고 같이 가자고 조르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하던 일을 접고 아기의 앰브 백을 교대로 잡으고 앰뷸런스에 올랐다. 아기는 낙상하면서 폐를 다쳐서인지 계속 삽관된 호흡관으로 약간의 출혈이 나와서 계속 흡인을 해야 했고 어느 부위를 얼마나 다쳤는지 알 수 없는 상태였기에 빠른 이송이 필요했다.


 다행히 앰뷸런스로 30분 정도가 채 걸리지 않고 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하였다. 외상 환자가 없는 우리 병원과는 다르게 응급실에서 응급으로 심초음파며 폐 검사, 각종 검사가 동시에 진행되는 것을 보며 '역시 달라'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 전공의 선생님과 나는 응급실 문을 나섰다.


 그때 갑자기 그 아이의 아버님께서 지폐 몇 장을 손에 쥐시고 뛰어나오면서 우리를 쫒아오셨다.


 "선생님들, 너무 감사드립니다. 제가 억지인 줄 알면서도 너무 다급하여 선생님들께 부탁드렸습니다. 이거 얼마 안 되지만..." 하시면서 지폐를 쥐어 주시는 것이었다.


우리는 손사래를 쳤지만 결국은 그 지폐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의 뻘게진 눈시울에 우리도 눈물이 쏟아졌기에....



 며칠 후 소문으로 듣기에 14층에서 떨어진 아이 치고는 뇌며 척추며 크게 다친 곳이 없었고 폐의 타박상으로 인한 약간의 부종 치료, 다리의 한 군데 골절 치료 정도를 하면 된다고 들었다.     

 세상엔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랑이 있다. 드라마 주제인 남녀 간의 천년의 사랑, 종교인들이 말하는 절대자의 큰 사랑. 스승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 애완동물에 대한 사랑, 조국에 대한 사랑...


내가 본 사랑 중에 가장 큰 사랑은 역시 부모님의 자식 사랑이었다. 나 또한 그 사랑에 중독된 상태이고 아직도 진행 중이다.            



                                    

제목: Le Berceau (요람, 베르트 모리조 작품, 1872, 오르세 미술관 소장)    


 인상파의 최초 여류 화가였던 베르트 마리 조가 언니인 에드마와 그녀의 딸 블랑 쇠를 모델로 그린 작품이다. 과거의 성모자상을 보다 세속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베일은 아기를 보호하는 장치로 보이며 어머니의 아이에 대한 애정과 보호의 감정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기교를 부린 흔적이 없지만 지나치지 않은 유려한 붓터치에 섬세한 감수성을 삽입한 인상파 회화 작품의 걸작으로 꼽힌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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