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거울로서 AI - 기록 평가의 윤리와 반사성
인공지능은 감정을 대체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비춥니다(reflect). 감정 컴퓨팅은 기계가 인간의 정서를 탐지·표현하도록 설계된 기술입니다. 이때 생성되는 감정 데이터는 사회 전체가 어떤 사건에 감정적으로 반응했는지를 보여주는 정서적 지도(emotional cartography)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Picard, 1997).
그러나 이제 그 지도는 더 이상 위에서 내려다보는 거대한 지도가 아닙니다. AI가 만들어내는 지도는 각 개인의 마이크로 메모리얼로서, 짧은 문장, 표정, 클릭, 해시태그와 같은 감정의 미시적 단위들이 서로 겹쳐 생성되는 모자이크입니다. 기억은 중앙집중적 보존의 대상이 아니라 분산된 네트워크 속에서 감정 레이블로 묶여 계속 갱신되고 재해석되는 동적 데이터로 변모합니다.
* 어릴 적 살던 집과 동네가 개발로 없어지고 유인 작가에게 남은 것은 사진 몇 장과 희미한 기억 뿐이다. 익숙했던 풍경들이 사라질 때면 그곳에서 보낸 그의 시간도 함께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유인 작가는 자신이 사랑하는 풍경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을 시작했다. (전시 설명 중 일부 발췌)
한편 루치아노 플로리디(Floridi, 2013)는 AI를 단순한 기술적 도구가 아닌 지식 생산의 행위자(epistemic agent)로 규정하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피스테믹 윤리(epistemic ethics)의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AI가 정보를 수집, 분석해 지식을 구성할 때 그 결과에 내재된 의미 왜곡과 가치 판단의 책임은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활용하는 인간에게 귀속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감정을 데이터로 환원하는 과정에서 감정이 지닌 서사적 맥락과 관계적 의미가 제거될 위험이 큽니다. AI가 감정을 수치화하는 순간 감정의 다층적 현실은 단일 지표로 단순화되고 인간의 경험은 통계적 사실로 축소되기 쉽습니다. 따라서 AI는 감정의 복잡성을 비추어 드러내는 반사체(reflective surface)로 기능해야 합니다. 윤리적 AI는 감정을 대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흔적을 책임 있게 재현함으로써 인간의 감정을 다시금 성찰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AI는 수많은 마이크로 메모리얼이 남긴 흔적을 기록합니다. 이 작은 감정의 단위들이 모여 사회적 감정의 집합적 초상(collective portrait)을 형성합니다. 이때 AI의 역할은 기록 행위의 주체라기보다는 감정의 잔향을 반사적으로 재현하는 감정의 메타기록자(meta-recorder)에 가깝습니다. 즉, AI는 감정의 인식론적 주체가 아닌 감정의 반사적 매개체로서 우리가 무엇을 느끼며 기록했는가를 비추는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AI의 감정윤리는 'AI가 인간의 감정을 대체할 수 있는가?', 나아가 'AI가 감정 기반의 기록 평가를 대체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AI가 인간의 감정을 어떻게 책임 있게 반사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AI 시대의 기록학은 거시적 메모리얼의 질서가 해체된 이후, 각 개인의 마이크로 메모리얼이 얽혀 만들어내는 감정의 네트워크 속에서 새로운 기억의 윤리와 사회적 감정의 조화 방식을 모색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