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의문이 들었습니다.
AI가 제 파일을 읽고 정리해주는 건 좋은데, 이게 끝인가? 분류하고 태그 달고 연결하는 것. 예전에 수동으로 하던 일을 AI가 대신해주는 것뿐인가? 뭔가 더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때 RAG가 필요하다는 것을 됐습니다.
RAG(Retrieval-Augmented Generation). 검색 증강 생성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AI에게 질문을 던지면 AI는 먼저 관련된 자료를 검색합니다. 그 자료를 바탕으로 답변을 생성합니다. AI 모델이 학습한 일반적인 지식이 아니라 제가 제공한 자료를 기반으로 답한다는 뜻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제 노트들을 RAG에 연결하면 AI는 제 노트를 '읽은 상태'로 대화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전에 정리한 그 내용 있잖아"라고 하면 진짜로 찾아서 대답해줍니다. 제 기록을 기억하는 AI. 그게 가능해진다는 거죠.
프롤로그에서 말했듯이 저는 디지털 호더였습니다. 저장은 잘하는데 활용을 못했습니다. 어디에 뭘 저장했는지 찾는 것부터가 일이었습니다.
RAG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줬습니다.
더 이상 제가 직접 검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거 있잖아, 얼마 전에 본 그 아티클"이라고 모호하게 물어봐도 됩니다. AI가 제 노트들을 뒤져서 관련된 것을 찾아옵니다. 정확한 키워드를 기억 못 해도 됩니다. 맥락만 던지면 AI가 연결해줍니다.
저장한 것들이 비로소 살아났습니다.
'두 번째 뇌(Second Brain)'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티아고 포르테라는 작가가 제안한 개념인데, 외부 시스템에 지식을 저장해서 생물학적 뇌의 한계를 보완하자는 아이디어입니다.
인간의 뇌는 기억에 한계가 있습니다. 망각하고, 왜곡하고, 용량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메모하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기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기록해놓고 못 찾으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두 번째 뇌는 단순한 저장소가 아닙니다.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연결되고, 검색되고, 활용되어야 합니다.
제가 만든 건 AI가 연결된 두 번째 뇌였습니다.
RAG가 잘 작동하려면 자료가 잘 정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쓰레기를 넣으면 쓰레기가 나옵니다. 제 노트들이 엉망이면 AI도 엉망인 결과를 내놓습니다.
그래서 구조를 새로 설계했습니다.
폴더는 번호와 용도로 구분했습니다. 00-system은 템플릿과 설정 파일, 10-work는 업무나 프로젝트 관련 자료, 20-insight는 생각과 아이디어, 30-knowledge는 학습한 지식, 40-personal은 일상과 기록, 50-resources는 참고 자료, 90-archived는 완료된 프로젝트. 이렇게 큰 틀만 잡고 나머지는 태그와 링크로 연결했습니다.
모든 노트에는 메타데이터를 달았습니다. 제목, 날짜, 태그, 출처. AI가 이 메타데이터를 보고 노트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게 했습니다.
노트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이해 가능하도록 작성했습니다. 맥락 없이 그 노트만 봐도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게. AI가 개별 노트를 가져왔을 때 그것만으로 충분한 정보를 담도록 했습니다.
기록학에서 아카이브는 단순한 저장소가 아닙니다. 보존하고, 정리하고, 제공하는 기능을 합니다. 보존만 하고 활용을 못 하면 그것은 죽은 아카이브나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 뇌는 살아있는 아카이브입니다.
쌓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시스템. 기억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연결하고 확장하는 시스템. 그게 제가 만들고 싶었던 것이었고, RAG를 통해 비로소 가능해졌습니다.
두 번째 뇌가 완성되고 나니 비로소 지식을 활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이 더해졌습니다. 인간의 뇌가 첫 번째 뇌라면, 아카이브(기록 시스템)는 두 번째 뇌입니다. 그렇다면 AI는 무엇일까요? 저는 AI를 '세 번째 뇌'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 뇌는 감정과 기억을 담당합니다. 두 번째 뇌는 보존을 담당합니다. 세 번째 뇌는 패턴 인식과 연결을 담당합니다. 이 셋이 협력할 때 비로소 완전한 지식 시스템이 됩니다.
인간 혼자서는 기억에 한계가 있고, 아카이브만으로는 죽은 저장소가 되고, AI만으로는 맥락 없는 기계가 됩니다. 셋이 함께할 때 각자의 결핍을 채웁니다.
제가 만든 시스템은 이 세 개의 뇌가 협력하는 구조였습니다.
제 볼트에는 이미 5000개가 넘는 파일이 있었습니다. 몇 년간 모아온 PDF, 스크랩한 아티클, 회의록, 메모들. 저장은 열심히 했는데 활용은 못 하고 있었습니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저도 몰랐습니다.
RAG를 연결하자 그 자료들이 살아났습니다.
"예전에 읽은 기억과 외부 저장장치 관련 논문 있잖아"라고 하면 2년 전에 저장한 PDF를 찾아왔습니다. "비슷한 주제로 뭐 정리한 거 없어?"라고 하면 서로 다른 폴더에 흩어져 있던 노트들을 연결해줬습니다. 존재조차 잊고 있던 자료들이 다시 쓸모 있어졌습니다.
연결이 늘어날수록 시스템이 강해졌습니다. 노트 A와 노트 B가 연결되면 A를 찾을 때 B도 함께 떠오릅니다. 연결이 많아질수록 하나의 질문에 더 풍부한 답이 나왔습니다. 네트워크 효과처럼 연결 자체가 가치를 만들어냈습니다.
예전에는 노트를 쓸 때 '지금의 나'만 생각했습니다. 지금 필요한 정보를 지금 편한 방식으로 적었습니다. 나중에 찾을 생각은 별로 안 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노트를 쓸 때 '미래의 나'를 대비합니다. 내일의 내가, 6개월 뒤의 내가 이 노트를 봤을 때 이해할 수 있을까? AI가 이 노트를 읽었을 때 맥락을 파악할 수 있을까? 그런 관점으로 쓰니까 노트의 질이 달라졌습니다.
모든 노트가 미래의 나를 위한 준비가 되었습니다. 과거의 내가 대비한 지식들 덕분에 오늘의 나는 더 풍부한 창조적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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