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17>을 보고.
살면서 우리는 많은 경험을 합니다. 그러나 그 경험들이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짜증 나고 화나고, 내 의도와는 다른 일을 했던 경험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경험을 겪을 때면 항상 짜증이 났습니다. 시간을 날린 것 같고 헛수고만 한 것 같아 언짢고 허탈했습니다. 하지만 샘 맨더스의 영화 <1917>을 보고 이런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영화 1917은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영화의 주인공 '스코필드'와 '블레이크'는 서부전선의 한 참호에서 장군으로부터 함정에 빠진 부대의 지휘관(매켄지 중령)에게 공격 중지 명령을 전하라는 임무를 받습니다. 이들의 참호에서 그들이 있는 곳까지는 약 15km. 이 사이에는 전쟁으로 황무지가 된 노 맨스 랜드(No men's land)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들이 이 참혹하고 지독한 15km를 뚫고 가는 모습을 그립니다.
블레이크는 매켄지 중령 부대에 자신의 형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를 구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각오를 다집니다. 하지만 스코필드는 단지 블레이크 옆에 자고 있었단 이유로 그곳에 끌려왔습니다. 스코필드에게는 그 작전을 수행해야 할 어떠한 동기도 없었습니다. 스코필드는 지난 전장 때 받았던 훈장도 와인과 바꾸어 먹을 정도로 전쟁의 부질없음에 대해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스코필드는 블레이크와 부비트랩에 당할 뻔했을 때, 왜 하필 자신을 고른 것이냐며 화를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이런 모습은 긴 여정 동안 여러 상황을 겪으며 변합니다. 그리고 온갖 역경을 견뎌내며 마침내 매켄지 부대에 도달합니다.
맞고 찔리고 지치고 힘들고 젖고...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스코필드는 살아있습니다. 부대가 적의 함정으로 돌격하기 직전, 얼른 전갈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폭격과 총알이 빗발치는 참호 밖을 달립니다. 매켄지 중령이 있는 막사에 도착하고 중령에게 강력한 어조로 전쟁을 멈춰야 한다며 이야기합니다. 영화 후미에는 극 중 초반 보였던 스코필드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는 변해있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바뀐 스코필드 모습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그는 성장한 것일까?' 무언가 그런 것 같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가 성장했다고 말하기 싫었습니다. 그는 괴롭고 짜증 나고 끔찍한 경험을 겪고 왔습니다. 또한 변한 그의 모습은 그가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이런 고통스럽고 쓸데없는 경험을 통한 성장은 내가 생각하는 밝고 아름다운 성장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변화에 성장이라는 훈장을 달아주기 싫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곰곰이 생각을 해보아도 그는 성장한 게 맞습니다. 전과 달라진 눈빛, 행동, 태도. 그는 분명 전과 달라져있었습니다. 그는 충분히 성장이라는 훈장을 달 자질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은 그가 성장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제가 성장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아름답고 빛나는 성장만을 성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언가 밝고 대단한 일을 할 때만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공부를 하고, 운동을 하고, 밥 잘 먹고, 여러 사람을 만나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경험 속에서만 성장이 꽃핀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성장은 언제나 그런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싫고 짜증 나고 괴로운 경험 속에서도 성장합니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방향이든 아니든 어쨌든 우리는 성장합니다. 우리는 태어났을 때부터 끊임없이 성장하게 돼있습니다. 만약 크고 대단한 일을 통한 성장만을 성장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끊임없는 성장의 기회를 놓치고 말 것입니다. 이미 이룬 성장도 의미 없고 부질없는 것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성장은 내가 의도하고 조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장은 언제나 일어나고 항상 진행되는 것입니다. 특별한 일, 대단한 일은 인생에 있어 한 두 번 밖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특별한 일이 없어서', '나에게는 멋진 일이 안 생겨서'와 같이 특별한 일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지속적인 성장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어떤 경험을 통해 성장할 것이냐'가 아니라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성장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 인 것 같습니다. 영화 1917은 제게 성장이란 어떤 것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해 준 좋은 영화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