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 하는 답인 줄 알았습니다.
최근 이연님의 유튜브를 즐겨 보고 있습니다. 그림도 잘 그리실뿐더러,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서 이것저것 배울 점도 참 많은 분입니다. 한 영상에서 이연님은 이런 말을 하신 적 있습니다.
"저는 그림을 정확하게 그릴 의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느낌을 살려서 그리면 그게 제 나름의 창작이기 때문에, 저는 똑같이 그려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벗어난 지 꽤 오래됐어요."
며칠 전 소개한 책 타일러-'두 번째 지구는 없다.'에서 타일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에게 레고 놀이는 설명서가 존재하지 않았다. 설명서가 존재한다는 것도 몰랐다. 레고에 설명서와 만드는 방법이 있고, '~만들기' 식의 패키지가 나온다는 것은 서울에 와서 주변 한국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알게 되었다. 물론 그전에도 마트에서 패키지로 파는 것을 봤지만, 설마 그렇게 똑같이 만드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하고 지나쳤는데 알고 보니 그 목적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언제부턴가 저는 무언가를 똑같이 만드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무엇을 할 때도 내가 따라야 할 롤모델을 정하고, 무엇을 만들 때도 내가 비슷하게 완성시켜야 할 무언가를 찾았습니다. 그동안 이런 '따라 하기'는 제게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언가를 따라 하지 않아도 충분히 멋진 것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따라 하기는 덜 고민해도 되고, 쉽게 평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것은 결코 원작을 이기지 못합니다. 따라 하기로 만든 작품은 언제나 원작자의 그늘 밑에 서식할 뿐입니다.
따라 하기만 하는 사회는 발전할 수 없습니다. 거대한 나무 밑에 자라나는 나무는 모두 죽습니다. 숲을 이루는 나무들은 거대한 나무 밖에서 자라난 나무들 뿐입니다. 따라 하는 것은 원작자의 밑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웅크리고 있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모두 잊힙니다. 다양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원작자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결과가 형편없고 작을 지라도, 그늘에서 벗어난 순간 그것은 숲을 이룰 가능성을 가집니다.
그동안 저는 따라 하기를 당연시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따라 하는 것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따라 함으로써 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따라 하기로 인해 가능성을 잃을 수 있습니다. 놓친 편함은 훗날 돌아올 수 있지만, 놓쳐버린 가능성은 돌아오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