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랑주 VMD님의 - '오래가는 것들의 비밀'을 읽고.
예술가와 디자이너의 차이는 뭘까요? 건축학과를 졸업한 저는 한 때 이런 고민에 빠져 있던 적이 있었습니다. 뭔가 조금 있어 보인다 생각해서였을까요, 저는 저 스스로를 예술가나 디자이너라고 칭하고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때는 그 두 단어에 대한 저만의 정의도 없었고 별다른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냥 둘 다 무언가 '예술 활동'을 하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한 디자이너의 인터뷰 영상을 보게 됐습니다. 그 인터뷰에서 그 디자이너는 예술가와 디자이너를 이렇게 정의하더군요.
'예술가는 자기 색깔을 표현하는 사람이고 디자이너는 사람들의 니즈를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이거구나. 솔직히 그때는 이러한 정의는 제게 꽤나 와 닿았습니다. 항상 작품 활동을 하면서 나의 생각과 주변의 요구 중 어떤 것을 따라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던 저에게 이러한 이분법적인 정의는 매우 유용했습니다. 결국 저는 예술가는 자기의 세계를 주체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고, 디자이너는 상대의 니즈에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구나 하고 나름의 정의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저의 생각은 불과 며칠 전 까지도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형의 추천으로 '이랑주' 비주얼 멀천다이저(VMD)님의 책 <오래가는 것들의 비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동안 제가 했던 이러한 모자란 생각을 바꾸게 해 주었습니다.
책 '오래가는 것들의 비밀'은 이랑주 VMD님이 지금까지 만났던 수많은 상점과 브랜드들 중 오랫동안 그 명문을 유지해온 것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에 대해 나름의 통찰력을 제시한 책입니다. 이 책은 많은 사례들과 비교를 통해 가게를 전통성 있고 오래 가게 하는 방법을 이해하기 쉽게 기술합니다.
이 책은 저에게 디자이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습니다. 저는 앞서 말했듯, 디자이너를 단순히 사람들의 니즈에 따라 작업을 해주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책에서는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나온 디자인은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책에는 '60가지 화분을 가진 꽃집'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꽃집은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의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람들이 요구하는 모든 화분을 모읍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60가지가 넘는 화분을 가진 꽃집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 꽃집은 이 꽃집만이 가지는 어떠한 특색도 가지지 못한 채 그저 그런 꽃집 중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됐습니다.
이는 사람들의 니즈를 수용하기만 한 디자인이 왜 오래갈 수 없는지에 대해 잘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사람들의 니즈는 다채롭고 끝이 없기 때문에 이처럼 사람들의 니즈를 따른 디자인은 이도 저도 아닌 이상한 디자인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디자이너는 단순히 사람들의 니즈를 표현하는 사람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디자이너는 어떤 디자인을 해야 할까요? 책에는 브랜드나 상점이 오래갈 수 있는 방법을 총 7가지로 분류해서 이야기합니다. 각 7가지 방법 모두 다 저마다의 차이점은 있지만 이 모두가 이야기하는 공동적인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통을 가지는 것. 즉 오래가는 것들에는 모두 그들만의 전통적 디자인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전통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요? 여기서 작가는 매우 좋은 문구를 예시로 들어 이야기합니다. '흔들리는 진통은 흔들리지 않는 전통을 만든다.' 이는 사회 트렌드가 끊임없이 변화한다 하더라도 굳건히 자기 자신만의 색깔을 지켜나가는 것이 전통을 만드는 방법이라는 뜻입니다. 즉 전통을 가진 디자인은 사람들의 니즈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디자인이 아닌 그 상점/브랜드가 보유하고 있는 고유의 색깔을 꾸준히 표현하는 디자인입니다.
이는 어찌 보면 제가 초반에 이야기했던 예술가와 디자이너의 정의와 매우 상충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결국 디자이너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니즈 표현' 보다는 예술가와 같은 그 브랜드와 상점에 대한 '자기표현'입니다. 다만 예술가는 그 주체가 자기 자신인 반면 디자이너는 그 주체가 브랜드나 상점일 뿐입니다. 결국 지금 시대에 예술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능력은 한 개체가 가지는 독창적인 색깔을 어떻게 찾아내고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지에 대한 연구인 것 같습니다.
물론 사람들의 니즈를 아예 무시하고 자기 자신만의 색깔을 표현하는 것은 문제 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람들의 니즈 때문에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더욱 큰 문제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소수의 사람을 오래 속일 수 있고 다수의 사람을 잠깐 속일 수 있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을 오래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자신의 사업이나 브랜드가 오랜 기간 유지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만의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책 '오래가는 것들의 비밀'은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오래가는 디자인을 하기 위해 디자이너는 어떠한 방법과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매우 쉽고 재밌게 잘 풀어낸 좋은 책입니다. 브랜딩이나 디자인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께서는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