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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미융합소 Sep 18. 2020

나의 나오코 나의 미도리.

무라카미 하루키 -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를 읽고 난 후, 내가 그동안 이렇게 대단한 작가의 소설 하나 읽어보지 않았단 것에 회의감을 느끼고 그의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을 구매했다. 평소 소설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 나였기에, 완독까지 조금 긴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렇기에 소설의 잔향도 진하게 남는 듯하다.

 

 2020년 9월 17일 밤 10시. 리디북스 e-book페이지로 450쪽가량 남은 책을 아무것도 하기 싫은 게으름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2시간 남짓 걸린 이 독서 덕분에 현재 나는 비가 내리는 새벽 1시 불을 끈 채 노트북 조명을 벗 삼아 '가쓰오 우동'과 '진로 소주'를 마시고 있다.




 처음으로 읽은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은 가쓰오 우동과 진로 소주의 조합처럼 매우 연하면서 진했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나오코와 대학교에서 만난 미도리 사이에서 자신의 감정을 조율한다. 나오코는 와타나베와 같은 소꿉친구이자 그의 전 남자 친구인 기즈키의 죽음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고, 미도리는 사회에 살지만 다른 남자 친구가 있다. 와타나배는 그 둘과 알 수 없는 끌림을 받으며 양측의 사랑을 모두 원한다.


 와타나베는 그녀 둘 사이에서 가쓰오 우동의 국물처럼 조용하고 연한 감정을 쌓는다. 막 20대가 된 숫기 어린 그는 그녀들과의 소소하고 평범한 만남을 가진다. 작중 대단한 사람으로 나오는 ‘나가사와’의 연애에 비하면 조촐하기 그지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녀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소주의 끝 맛처럼 진한 잔향을 남긴다. 한 모금 들이킨 알코올이 정신을 헤집는 것처럼, 그녀들과의 만남은 와타나베의 감정을 헤집는다.


와타나베가 어떤 선택을 할 지는 책을 통해 확인바란다.



 나오코는 와타나베에게 이상적인 존재다. 자신의 절친 가츠키가 사랑했던 여인, 너무나도 아름다운 성적 존재. 그는 정신병원에 있기에 관계를 할 수 없는 그녀를 상상하며 스스로를 자위한다. 반면 미도리는 그에게 현실적인 존재다. 그녀는 현실에 살고 있으며 와타나베의 매력에 끌린 미도리는 와타나베에게 적극적이다. 남자 친구가 있음에도 와타나베를 좋아한다 말하고, 자신을 상상하며 자위를 해달라고도 요청한다. 그녀와 야한 농담을 주고받고 함께 부둥켜안고 자도 그는 이상을 깨지 않기 위해 그녀와 관계를 하지 않는다.


 와타나베는 자신이 어릴 적 동경하던 꿈과 자신의 현실적 욕구 사이에서 고민한다.

'내가 나오코에 대해 느끼는 것은 무서우리만치 조용하고 상냥하며 맑은 애정이지만, 미도리에게 느끼는 내 감정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땅을 발고 서서 걷고 숨 쉬고 고동치는 무엇입니다.'
(노르웨이의 숲 - 1326p(e-book)

 그는 자신이 동경하던 닿을 수 없는 그림자에 깊이 빠져있었다. 그림자를 쫓던 와타나베는 자신을 위해 다가와 있던 현실을 놓치고 만다. 당연한 줄만 알았던 현실이 그의 곁을 떠났을 때, 와타나베는 자신이 홀로 남겨졌음을 느낀다. 현실의 큰 의미를 깨달은 그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극심한 갈등을 겪는다. 와타나베가 진심으로 미도리를 바라보는 것은 나오코가 죽고 난 이후이다.



 

 우리는 모두 내면에 자신만의 나오코를 가지고 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에게 환상을 심어준 ‘그것’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다시 한번 만나길 간절히 바라며, 오랫동안 기억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리 노력하여도 그것에 닿을 수 없다. 그것은 기억 속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투시도의 소실점처럼 ‘이상’은 우리의 관심을 한 곳에 몰리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그려낸 풍경만이 진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투시도는 관찰자 주변을 그리지 못한다. 이상에 몰입한 우리는 주변의 사물을 잊은 채 세상을 바라본다.

 

 당신의 주변에는 미도리가 있는가? 당신에게 헌신하고, 자신의 소중한 것을 버리고도 당신을 찾아와 주는 사람 말이다.


혹시 ‘이상’에 침식되어 그녀를 잊고 있진 않는가? 당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쁜 치마를 입고 여성스러운 머리스타일을 하고 나온 그녀에게 '그 머리 예뻐.'라는 한마디도 건네지 못해고 있진 않는가?


나의 이상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당신은 그녀의 헌신을 못 본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은 당신에게 오래 매달리지 않는다. 닿을 수 없는 이상만 바라보다 현실마저 놓쳐버린다면 당신은 엄청난 공허함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공허함이 찾아왔을 때 그것으로부터 당신을 지켜주던 것이 이상이 아니었단 걸 깨달을 것이다.


 어릴 적 가지던 꿈이 아무리 완벽할지라도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때 알던 세계는 정상적이지 않은 세계이다. 우리가 믿던 세계가 현실과 맞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다면 우리는 그것을 51곡의 노래를 불러주는 한이 있더라도 떠나보내야 한다. 그리고는 떠나버린 현실을 되찾기 위해 그녀가 나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수개월간 끊임없는 대시를 해야 한다. 그녀가 나에게 다시 말을 하고 싶을 때까지. 아름다운 이상과 좋은 이별을 하고 나를 위한 소중한 현실과 마주했을 때 우리는 또 다른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잠겨 있다.'


죽음이란 것은 단순한 한 생명체의 죽음만을 뜻하지 않는다. 죽음은 한 세계의 종말이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수많은 죽음을 맞이하듯이 수많은 세계의 종말을 맞이한다. 자신이 믿던 이상적인 세계. 그것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


 '나는 살아 움직이는, 피가 흐르는 여자야. 그리고 나는 네 품에 안겨 널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있어. 네가 하라고 하면, 나는 머든지 할 거야.'


 하지만 나의 품에 안겨 있는 미도리는 현실이다. 그것은 살아있고 피가 흐른다. 나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는 이상에서 벗어나 나의 품에 안겨있는 현실을 맞이해야 한다. 이상에 치우친 사람은 주변을 상처 입히고 자신을 병들게 한다. 나오코와 함께 정신병동에 있던 레이코 씨처럼, 이상에서 깨어나 현실을 마주할 때 우리는 정신병동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오코를 사랑한다는 것은) 날씨 좋은 날 노를 저어 호수로 나아가 하늘도 푸르고 호수도 아름답다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어요. 고뇌하지 마요, 가만 내버려 두어도 흘러가야 할 곳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갈 것이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에게 상처를 주어야 할 때는 상처를 주게 되는 법이니.(중략) 당신은 때로 인생을 너무 자기 방식에만 맞추려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정신 병원에 들어가는 게 싫다면 마음을 조금 열고 그냥 흐름에 몸을 맡겨요. 나처럼 무력하고 불완전한 여자도 때로는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멋진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거든요. 정말이에요. 이거! 그러니 더 많이 많이 행복해져요. 행복해지려고 노력해요.' (노르웨이의 숲 p.1333 - 나오코가 죽고 난 후 레이코가 와타나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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