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명전 / 이바노비치 사바틴
'을씨년스럽다'라는 말은 '보기에 날씨나 분위기 따위가 몹시 스산하고 쓸쓸한 데가 있다'는 의미다. 이 말은 1905년 을사년에서 유래됐다. 1905년 11월 17일, 우리는 일제에 의해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10년, 대한제국은 국권을 피탈당하고 한일병합됐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는 덕수궁 경내에 있는 중명전이다.
중명전은 정동극장 서쪽에 있는 짧은 길 끝에 있다. 정동길과 이 길이 만나는 지점은 쉽게 인식되지 않는다. 대학교 학부 졸업작품을 준비할 당시 난 중명전을 처음 봤다. 당시 건물은 흰색이었다. 난 건물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지 않았다. 건물의 설계자가 러시아인 이바노비치 사바틴(Ivanovich Seredin Sabatin)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중명전 외 내가 봤던 사바틴이 설계한 다른 건축물은 옛 러시아 공사관(1885)과 인천광역시 자유공원에 있는 제물포구락부(1901)다. 흰색 외관의 두 건물에서 페디먼트(Pediment)나 기둥 등은 벽에 붙어 있었다. 이 때문에 처음 중명전을 봤을 때 당시 그 상태가 건물의 원래 모습인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몇 년이 지나 중명전 복원작업이 끝난 후 건물을 봤을 때 더 이상 내가 봤던 중명전이 아니었다. 흰색 외벽에 삽입돼 있던 요소들은 마치 땅 속에 묻혀 있던 죽은 자가 살아나듯 벽과 분리돼 있었다.
중명전이 정동 안에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이유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정동길에서 안쪽으로 들어와 있기도 했지만 바라만 봐도 경찰들에 의해 저지당하는 미국 대사관저와 벽을 맞대고 있기 때문이었다. 현재 중명전과 덕수궁 사이에 있는 미국 대사관저가 이곳에 자리 잡은 시기는 1884년으로 당시 미국 공사 루시우스 푸트(Lucius H.Foote)가 민영교와 김감역으로부터 $2,200에 대지와 건물을 구입하면서부터다. 그리고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이 대사관저 주변에 거처를 잡았다.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감리교회를 설립한 헨리 아펜젤러(Henry G.Appenzeller)와 윌리엄 스크랜튼(William B.Scranton), 호러스 언더우드(Horace G.Underwood)도 그다음 해(1885년)에 이 일대에 정착했다.
그러다 1895년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 낭인들에 의해 명성왕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고종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세자 순종을 데리고 이듬해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자기 나라 땅에서 망명을 한 셈이다. 1년 여의 시간이 지난 1897년 2월, 고종은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궁(還宮)했다. 그리고 경운궁을 대한제국의 정궁으로 정하고 그에 맞는 격을 갖추기 위한 영건 작업을 본격화했다.
하지만 당시 경운궁 주변에는 미국공사관, 독일영사관, 프랑스영사관, 러시아공사관 등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궁역의 확대와 함께 궁궐 주변의 가옥에 대한 전매를 금지했다. 동시에 외국인 주거지에 대한 건축 제한 조치도 취했다. 구체적으로 1902년 5월 21일에 대한제국 정부가 철도원에 정동 일대의 외국인 건물의 고도와 면적을 측량토록 한 뒤 궁궐 담장에서 500m 내에는 새로 집을 짓지 못한다는 규정을 각국 공사관에 통보했다. 이로 인해 정동 일대 대부분의 지역에서 경운궁 영건에 따라 건축 규모가 축소되거나 금지되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정동 일대 토지의 수용을 촉진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으나, 경운궁과 인접한 영국공사관과 미국공사관의 존재는 경운궁의 영역 확장에 여전히 걸림돌이었다.
경운궁 확장에 따라 외국의 영사관이 자리를 옮긴 사례는 독일공사관이 유일했다. 당시 독일공사관은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부지에 있었다. 외국공사관 소유 외의 토지는 대부분 개인 소유였는데, 미국인이 많았다고 한다. 이 중 상당수는 앞서 언급했듯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이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이 소유한 땅을 수용하기 위해 대토(代土)를 마련해 주는 조건으로 협상을 진행했다. 대토의 위치는 대부분 서대문 밖이었다. 현재 서대문구 충정로역 일대에 있는 근대건축물 -충정각(1910), 옛 경성성서학원(1921),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선교교육원(1921)- 들은 이런 협상의 결과다.
중명전이 있던 자리에는 호러스 알렌(Horace Newton Allen)의 사택이 있었다(정동1-11번지). 알렌은 사택 주변의 땅과 가옥을 매입했는데, 사택은 1885년에 언더우드에게 넘겼다. 하지만 사택을 실제 이용한 사람은 언더우드가 아닌 1886년 7월 서울에 도착한 애니 엘러스(Annie J.Ellers)였다. 그녀의 직업은 의사였다. 1887년 6월 언더우드는 엘러스에게 몇 명의 고아를 부탁했는데, 이때 엘러스가 자신이 머물던 사택에 여학당을 개설했다. 이 여학당이 정동여학당이다. 현재 잠실종합운동장 남쪽에 있는 정신여자고등학교의 모체다.
대한제국 정부가 정동여학당 자리를 매입하면서 정동여학당은 연지동 137번지로 이전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곳에 환벽정과 만희당 등 10여 채의 전각을 세웠다. 그중 하나가 '수옥헌(漱玉軒)'이었다. 고종 황제의 도서관으로 쓰인 수옥헌은 경운궁 내에서 구성헌과 함께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물로 평가된다. 그런데 수옥헌이 궁궐 건축의 하나로 지어졌는지 아니면 정동여학당 내 학교시설로 지어졌다 황제의 도서관으로 전용됐는지 정확하지 않다.
1901년 수옥헌은 화재로 소실됐다. 그리고 재건축됐는데, 이 건물이 바로 중명전이다. 재건축 후에는 황실 도서관 기능과 더불어 외국 사신을 알현하는 장소로 쓰였다. 그러다 1904년 일본인의 방화로 덕수궁에 큰 불이 났다. 고종황제가 머물렀던 돈덕전도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고종은 수옥헌을 경운궁의 편전과 임시거처로 사용했다. 황제가 항시 머무는 곳이 됐으니 건물의 이름도 바뀌었다. 중명전(重明殿).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이후 이 건물에서는 건물의 이름과 다르게 광명이 끝나서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사건들만 일어났다. 고종이 중명전으로 온 다음 해(1905년) 일제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1907년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네덜란드 헤이그(Hague)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했다. 당시 고종이 특사단을 파견한 장소도 바로 중명전이었다. 그런데 결국 특사는 헤이그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고 고종도 이 사건으로 강제 퇴위당했다.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까지 중명전은 고종의 편전이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었고 1912년에는 중명전이 서울구락부(Seoul Club)에 임대되었다. 당시 중명전뿐만 아니라 이 일대 전각들이 당시 관리주체였던 이왕직에 의해 하나씩 분할 매각되거나 임대방식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고종이 승하한 1919년, 결국 일제는 덕수궁의 궁역을 축소하였고 이때 중명전이 궁역에서 제외됐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석조전과 중명전 사이에 도로를 냈는데, 현재 미대사관저 동쪽을 지나는 덕수궁길이 이 도로다.
중명전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25년 3월 발생한 화재로 2층 전부가 불탔다. 재건은 빠르게 진행됐지만 원형에서 외벽 등 일부만 남긴 채 새로 지어졌다. 내가 중명전을 처음 봤을 때 상태가 당시 새롭게 지어진 모습이다. 해방 이후 중명전은 서울구락부, 아메리칸구락부 등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 1963년 일본에서 귀국한 영친왕 이은 공에게 정부가 이 건물을 증여하여 머무르도록 했다. 하지만 조선왕가의 말미가 비참했듯 이 건물의 운명도 비참했다. 영친왕의 아들 이구씨가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은행에 저당을 잡혔고 1977년 센타빌딩 소유 회사인 경한산업에 매각돼 사무용 건물과 주차장으로 쓰였다.
경한산업이 소유하고 있던 1983년 중명전은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경한산업 측에서는 반가울 리 없었다. 결국 2003년 인접한 정동극장이 부족한 주차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중명전을 사들였다. 그러다 2006년 11월 국가가 다시 매입해 복원공사를 진행해 현재의 모습이 됐다.
복원이 완료된 중명전을 처음 봤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발코니였다. 내게 중명전 발코니는 의외의 요소였다. 우선, 흰색 외벽일 때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던 요소였고 무엇보다 설계자가 러시아인 임에도 미국 남부의 따뜻한 지역에서나 만들 법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발코니에서의 공간감이나 느낌은 외부에서 봤을 때 보다 더 의외다. 건물의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그 경계를 거닐며 느끼는 공간감과 깊이감이 괜찮다. 특히, 2층 발코니를 통해 정동을 바라다보면 대한제국의 끝에서 을사늑약과 헤이그 특사의 실패로 실의에 차서 같은 장면을 바라봤을 고종이 겹친다. 중명전의 발코니는 공간이 지니는 역사의 힘을 깨닫게 해 준다.
2010년 중명전은 복원을 완료하고 일반에 공개됐다. 안내자의 안내에 의해 정해진 인원만 내부를 둘러볼 수 있는 시스템은 적절한 관람방법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건물이 복원됐다 하더라도 건물이 갖는 입지는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정동길에서 중명전으로 들어오는 50m의 짧은 길은 심적으로 길다. 안내판 외에 정동길에서 중명전을 인식시키는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중명전이 안고 있는 슬픈 역사는 현재의 우리가 그 건물을 인식했을 때 비로소 공감할 수 있다. 공감할 수 없는 역사는 신화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