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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ur Oct 27. 2022

이야기를 통한 재생

눈먼고래, 제주

'재정비'와 '재생' 프로젝트를 하고 있을 때 '도대체 재생이 뭐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자연스럽게 '도시재생 프로젝트와 도시개발 프로젝트는 무엇이 다를까?'라는 의문으로 이어졌다. 늘 그렇듯 답을 찾는 건 내 몫이었다. 프로젝트가 진행될수록 처음 생각은 무뎌진다. 나쁜 습관이다. 그럼에도 '재정비'와 '재생' 프로젝트를 하면서 흐려지지 않았던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하라 켄야Hara Kenya가 언급한 '리디자인Redesign'이었고 둘째는 '눈먼고래'라는 이름의 펜션이었다. 


하라 켄야는 《디자인의 디자인, 안그라픽스》에서 리디자인을 "일상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디자인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여, 누구나 잘 아는 형태를 통해 디자인의 리얼러티Reality를 찾아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제로Zero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도 창조지만 기존의 것을 미지화시키는 것 역시 창조"라고 했다. 두 프로젝트를 하면서 미지화시킬 수 있는 기존의 것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이유다. 하지만 -역시 하라 켄야가 얘기했듯이- "'리디자인'이라는 단어에는 이미 사회에서 공유되고 인지된 사물을 주제로 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즉, 내가 찾아야 했던 '기존의 것'은 기본적으로 두 프로젝트 대상지 내에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시민들 혹은 최소한 주변 거주자들이 공유하고 인지하고 있는 것이어야 했다. 결국 '기존의 것'을 두 프로젝트에서 찾지 못했다면 프로젝트에 더 깊게 침잠하지 못했거나 내 인사이트Insight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눈먼고래는 제주시 조천읍에 있는 돌집을 리모델링한 독채 펜션이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이곳을 계속 염두에 두었던 이유는 제주도 그중에서도 '조천'이라는 동네의 지역성과 제주 돌집을 신선한 방식으로 재생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가족과 함께 이곳에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는 개인적 이유도 있었다.


'재再-'는 '다시', '두 번째', 'Re-'를 의미한다. 이는 이미 이루어진 것, 즉 '기성旣成'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를 살리기(生) 위해서는 '기성'을 만들었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결과의 다름 만큼이나 접근 방식의 다름도 중요하다는 얘기다. 뒤집어 말하면 접근 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이는 재생이라기보다는 기성의 보완에 가깝다. '재정비'와 '재생'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두 프로젝트를 하면서 답답했던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두 프로젝트를 발주한 주체 -우연히도 처음에는 같았다- 도 그렇고 컨소시엄 내 도시계획 전문 업체도 그렇고 그들은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재생을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새로운 방식을 기대하기에는 지금까지 그렇게 일해온 경험이 없었다.

재생 프로젝트가 어려운 건 콘텍스트에 따라 접근 방식이 아주 조금이라도 다르다는 데 있다. 물론 도시재생을 위한 매뉴얼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개발 프로젝트를 선도했던 종합엔지니어링 회사들이 재생 프로젝트에서는 고전하고 있다. 그리고 업계 지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사무실을 차려 재생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내가 했던 두 프로젝트 중 하나는 나름대로 콘텍스트를 파악하는 노력을 했다. 해당 프로젝트의 콘텍스트를 파악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건 파악된 콘텍스트 속에서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였다. 공공데이터가 개방되고 테이터 분석 기술이 발전하면서 콘텍스트 파악이 과거에 비해 훨씬 수월해지고 정교해졌다. 그래서 더 중요해지는 것이 '이야기'다. 파악된 콘텍스트를 통해 그 주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 그 이야기가 프로젝트의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징해야 한다.


눈먼고래는 '눈이 먼 고래'라는 스토리텔링이 기획 및 설계 전반을 관통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건물이 있는 대지와 동네의 콘텍스트에서 나왔고 시설을 이용하는 일반인들에게 쉽게 어필appeal될 만큼 동화적이다. 눈먼고래에서 '눈이 먼 고래'라는 스토리텔링은 동네의 지역성을 잘 살린 다른 재생 프로젝트들과 비교했을 때 갖는 차별성이자 유일성이다. 내가 두 재생 프로젝트를 하면서 눈먼고래를 염두에 두었던 이유도 바로 이 이야기에 있었다.

눈먼고래가 있는 조천읍은 제주도 북쪽에 있다. 본토와의 거리로 따지면 제주도 내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다. 당연히 이 동네에 본토와 연결되는 항구가 있었다. 암초 때문에 정박하기 편한 항구는 아니었다고 한다. 과거 본토와 제주도의 관계에서 사람은 '귀양', 물자는 '조공'이라는 행위와 연관돼 있었다. 조천읍은 제주도로 귀양 온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배에서 내렸던 곳이었고 뭍으로 조공 갈 물자들이 안전하게 갈 수 있는 바람을 기다리던 곳이었다. 한자로 '朝天'은 '아침 하늘'이라는 뜻이지만 이는 사전상 두 번째 의미이고 첫 번째는 '입궐함', '천자를 배알함'이다. 이 동네에 세워진 정자의 이름이 '연북정戀北亭' -북쪽을 사모하는- 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조천읍은 제주에서 뭍과 가장 질긴 인연을 가지고 있는 땅이다. 이런 역사적 콘텍스트에서 읽어낼 수 있는 뉘앙스Nuance는 '타발성他發性', '어쩔 수 없는', '떠밀려 온' 등이다. 주체의 의지가 없다는 측면에서는 무기력함이 느껴지지만 위트Wit가 더해지면 '어쩌다가', '생각지도 못했는데', '실수로' 등의 엉뚱함으로 읽힐 수도 있다. 눈먼고래에서 '눈먼'이 위트를 더하는 수식어다.


눈먼고래는 조천읍의 만 안쪽에 있다. 만灣은 바다가 육지 안쪽으로 파고들어 와 있는 형태의 땅이다. 그래서 낮과 밤 하루에 두 번 열린다는 조천 앞바다의 길로 나아가서 바라보면 눈먼고래가 해안선을 밀고 들어간 듯하다. 돌담이 지붕선 바로 아래까지 올라와 있는데 이 모습은 마치 눈먼고래가 돌담 뒤로 숨어 관망하는 것 같다. 눈이 멀었으니 관망한다는 말이 모순이기는 하지만. 

만 안쪽에 남북으로 나란히 앉혀져 있던 두 채의 돌집을 보고 '눈먼고래' 같다고 말한 사람은 지랩의 노경록 소장이었다. "마치 먼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던 두 마리의 고래가 눈이 멀어 육지에 부딪혀 있는 모습"이라는 설명에 지랩 구성원 모두 느낌이 좋았다고 한다(스테이폴리오Stayfolio 홈페이지 인터뷰 중). 사실 노소장의 이 인사이트 하나가 눈먼고래 뿐만 아니라 이후 지랩의 매끄러운 제주도 진출로 이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눈먼고래는 지랩의 세 번째 작업이자 도약작이기 때문이다.


꾸준하게 증가하는 제주 관광객을 수용하기 위해 여러 가지 성격의 시설들이 개발돼 왔다. 그 과정에서 '진정한 제주 관광은 무엇인가?'라는 자문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돌하르방과 유채꽃 만으로는 제주관광이 발전할 수 없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그 과정에서 제주에는 정말 다양한 모습의 건축물들이 들어섰다. 관광·숙박시설에 한정해 보면 199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 지중해 스타일이었다(대표적으로 제주신라호텔과 롯데호텔). 제주도가 갖는 특유의 남국 분위기 때문이다. 지금은 헐렸지만 카사 델 아구아Casa del Agua를 리카르도 레고레타Ricardo Legorreta가 설계할 수 있었던 배경도 이 때문이었다. 이후 이런 분위기의 반작용으로 나온 건축물 중 하나가 이타미 준Itami Jun이 설계한 포도호텔(2006)이다. 어떤 모습이 됐든 대부분의 설계자들은 자신이 설계한 건축물들이 '제주스럽다', '제주답다'라고 설명한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가장 흔한 언급은 '오름의 닮음'이다. 하지만 그 오름을 닮았다는 건축물들 중 정말 오름을 떠오르게 하는 건축물은 아직 없다. 설령 오름을 닮았다 해도 그것이 '제주스러움'인지, '제주다움'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눈먼고래는 이런 논쟁의 피로 속에 등장했다. 그리고 그 방식은 현재까지 잘 사용되지 않았던 제주 돌집의 재생이었다. 이상묵 대표가 이끄는 스테이폴리오는 "제주도의 개발과 상업화를 둘러싼 갑론을박 속에서 그들의 생각과 작업 과정은 마을과 조화된 개발이라는 점에서 좋은 선례로 생각되어진다"라고 평했다. 그리고 "'눈먼고래'라는 공간이 완성된 후에도 마을과 자연스럽게 조화될 수 있다는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라는 지랩의 말을 인용(?)했다. 난 지랩이 눈먼고래 프로젝트를 하지 않았더라도 제주도와의 관계가 맺었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만큼 제주도가 처한 상황과 지랩의 고민은 맞닿아 있었다.


'지역이 갖는 정체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해당 지역이 갖는 흔적을 재생시키는 것이다. 눈먼고래의 목표도 기존 돌집이 간직하고 있는 "제주다움, 제주 감성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스테이Stay"였다. 지랩은 기존 돌집의 낮은 층고와 울퉁불퉁한 돌벽을 그대로 두었다. 실내에서는 방을 구획했던 벽을 철거하지 않고 낮은 돌담으로 바꿔 원형의 구조를 지켰다. 심지어 공사 과정에서 나온 오래된 목재를 테이블과 침대 등으로 재활용했다. 사실 낮은 층고는 숙박시설에서 불리한 요소다. 특히 바다와 같이 특별한 조망을 살리기 위해서는 층고를 높여 실내에서도 개방감을 주어야 한다.

눈먼고래 곳곳을 둘러보면 매력적인 부분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일단 두 개의 돌집과 두 개의 마당이 나란히 놓인 공간구조가 다양한 공간감을 만들어 낸다. 바다에 면한 바다마당에서는 바다를 바라볼 수도 있고 의자에 앉으면 돌담이 포근한 위요감을 이룬다. 두 건물 사이에 있는 숲마당은 개인 마당을 쉽게 가질 수 없는 -나 같은- 도시인들에게는 일종의 로망이다. 난 마당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멍하니 쳐다본다거나 파도소리와 바람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었다. 당연히 아이들에게는 맘 놓고 뛰어놀 수 있는 장소다. 눈먼고래에서 유명인들이 프라이빗파티를 즐기는 건 독채 펜션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숲마당이 있어서다. 가장 은밀(?)한 장소는 바다 고래 북쪽, 에어튜브Airtub가 설치된 바다에 면한 작은 공간이다.


내 생각에 눈먼고래에서의 핵심은 단연 지붕이다. 우리나라 민가는 대부분 초가지붕이었다. 초가지붕의 재료는 짚이다. 짚은 벼, 보리, 밀, 조의 이삭을  떨어낸 줄기와 잎이다. 그런데 제주도에서는 벼농사짓기가 어려워 짚이 귀했다. 그래서 짚이 아닌 억새풀을 지붕의 재료로 썼다. 문제는 지붕 위에 올린 억새풀 마저 날리는 강한 바람이었다. 결국 제주사람들은 못쓰는 그물 끝에 돌을 매달아 지붕 위에 올려 억새풀을 눌렀다. 이를 그물지붕이라 부른다. 여기에 방수 기능을 높이기 위해 검은 천을 씌우기도 하는데 이 모습을 보고 노경록 소장은 고래 등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물지붕이 제주도 만의 전통, 고유함이라 하더라도 똑같은 방식으로 시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럴 수도 있지만 이는 전통의 복원 혹은 전통 보존이지 재생의 방식은 아니다. 지랩은 형태는 검은 천을 씌운 그물지붕 처럼 생겼지만 재료는 전혀 다른 어두운 색 알루미늄징크Aluminium Zinc를 사용했다.

눈먼고래의 지붕은 제주 그물지붕의 재생이라 평가할 만큼 성공적이다. 이는 눈먼고래 한 건물뿐만 아니라 집합된 모습에서도 제주 특유의 모습을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눈먼고래의 지붕을 현재 낡아서 무너진 다른 돌집들에 씌운다 해도 제주 특유의 동네 모습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이는 기존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기존의 가치를 살리면서도 기존의 것을 더 좋게 만드는 재생이 추구해야 할 방식이다. 앞서 인용한 하라 켄야의 이야기를 적용해 보면 기존의 것(그물지붕)을 미지화시키는 작업이 눈먼고래의 지붕이다. 무엇보다 눈먼고래에서는 검은 천이 씌워진 그물지붕이 주었던 고래등 같은 인상도 그대로 살렸다. 그래서 눈먼고래는 새로운 지붕으로 인해 정말 고래 같아 보인다.


건물이 특정한 형태를 닮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가장 쉽고 직관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방법임에는 틀림없다. 건물의 인상을 결정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부분은 지붕이다. 그래서 지붕이 어떤 형태를 닮으면 건물 전체가 그 형태를 닮은 것처럼 보인다. 만약 눈먼고래의 지붕이 지금과 다르게 만들어졌다면 '눈이 먼 고래가 어쩌다 조천읍까지 흘러왔다'는 스토리는 큰 공감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제주 돌집이 눈먼고래가 되자 파생되는 이야기는 끝이 없어진다. 내가 재생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다른 프로젝트에서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다. 공간을 통한 이야기의 확산과 파생. 눈먼고래가 된 돌집의 지붕 아래 나무 구조체는 고래의 등뼈가 된다. 그리고 건물 안에 머무는 투숙객은 고래 뱃속에 들어간 사람이다. 아이들에게 '고래 뱃속'은 피노키오 같은 동화를 떠오르게 하고 성인에게는 잉태된 생명체로써의 원초적 느낌, 편안함으로 이어진다. 딸아이는 두 동과 그 사이에 있는 숲 마당을 보며 두 고래의 관계를 엄마와 아이로 생각했다. 그러면서 엄마 고래(바다고래)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잘 테니 아빠와 엄마는 아이 고래(숲고래)에서 자라고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아빠, 엄마는 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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