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2.16, 방글이 6세)
속설에 따르면 자식이 잘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무관심'이 필요하다는데 나는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고 엄청난 정보력을 -재력은 뭐 말할 것도 없고- 발휘하지도 않아서 늘 아내가 피곤하다. 자식 교육에 나름의 원칙은 '아이가 어떤 부분에 머리를 열었다고 생각되면 뭐가 됐든 던져주자!!'이다.
어느날 퇴근하고 집에 온 내게 방글이가
"아빠 '배울 學학' 글씨가 너무 웃겨요?"라고 얘기했다. 무슨 얘기인가 싶어 되물었더니
"한자로 '學'자가 너무 웃기게 생겼다고요. 다리 꼬고 앉아 손뼉 치고 있는 모습 같아요."라고 답했다.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지니가 거들었다.
"방글이가 갑자기 한자에 관심을 갖길래 몇 자 가르쳐 줬더니 하는 소리야."
그 일이 있던 주말, 한문으로 가득 찬 입면의 탄허 대종사 기념박물관(이하 탄허박물관)으로 아내와 방글이를 데리고 갔다. 박물관을 둘러보는 내내 아이는 여기저기 적힌 수많은 한자 속에서 자신이 아는 한자를 찾았고 그 외 모르는 한자 중 신기하게 생긴 한자의 뜻을 다행히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는 박물관을 둘러보는 내내 열심히 한자 사전을 검색해야 했다.
유리에 새겨진 한자는 금강반야경(이하 금강경)이다. 금강경의 원본은 산스크리트어다. 그럼 왜 탄허박물관 입면에 금강경이 새겨져 있는 걸까? 탄허박물관은 한국의 고승이자 불교학자인 탄허 스님(1913~1983)의 뜻을 기리고 그의 유지를 연구하려는 목적으로 지어진 기념 및 강학 공간이다. 탄허 스님의 속명은 김금택이고 법명은 택성이다. 그럼 탄허呑虛는? 법호다. 뜻은 '허공을 삼키다'다. 왠지 멋있고 기개도 넘쳐 보인다. 탄허 스님은 선종과 교종이 일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교의 기본 경전 15종 74책을 번역하셨고 강의를 통해 많은 중생들에게 경학사상을 심어주었다. 화엄경을 최초로 번역한 사람도 탄허 스님이다. 금강경도 그가 번역한 불경 중 하나다.
그가 살아온 인생답게 탄허 스님은 "한 나라와도 바꾸지 않을 만한 인재를 길러내라"는 말씀을 남기셨는데 그의 제자였던 혜거 스님이 포이동 금강선원에서 한문을 강의한 이유도 스승의 뜻을 잇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탄허박물관 건립 목적 중 역사와 한문을 공부하는 장소를 만든다는 것도 있었다 <리뷰 Review 금강도량의 꿈: 탄허대종사기념박물관, 서정일, 와이드WIDE 201009(no.17)>. 그러니 내가 방글이를 이곳에 데리고 간 건 건축물 건립 목적에 어느 정도 부합했다고 볼 수 있다(에둘러 합리화하기).
탄허박물관이 들어선 땅은 개발제한구역으로 규제가 심했다. 그럼에도 의뢰인은 탄허를 기념할 수 있는 전시시설 외 경전학당, 불당 및 선원으로서의 기능도 포함해 주기를 원했다. 설계자 이성관는 이런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기능을 쌓고 상황에 맞게 용도를 바꿀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었다. 그는 우리나라 사찰 배치 방식에서 해법을 찾았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사찰은 산(자연)을 배경으로 일주문-천왕문-불이문-본당으로 이어지는 내향적, 점층적 공간 구성을 띄고 있다. 문과 그 다음 문으로 둘러싸인 영역은 속俗의 세계에서 본당이라는 궁극적인 성聖의 세계로 이르기 전에 단계적으로 거치는 전이 공간이다. 산속에서 각 영역은 땅의 높이가 다르기는 하지만 수직적으로 포개지지 않고 수평적으로 펼쳐진다. 그러나 탄허박물관은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설계자가 제시한 방식은 '다층의 집중적 공간으로 풀어내 일종의 공간 여정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다.
여정은 1층에 있는 주차장에서 시작한다. 이 주차장이 현대판 하마비下馬碑인 셈이다. 전통 사찰 배치에서 동선이 시작되는 일주문은 주차장 북쪽에 만들어진 주출입구로 연결된 통로다. 물론 주차장에서 이 통로를 이용해 건물 2층으로 진입하려면 동선이 꼬인다. 이보다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2층 메인 홀Main Hall로 바로 진입하는 게 더 편하다. 형식을 앞세우다 보면 생기는 현상이다. 일단 설계자가 설정해 놓은 동선으로 이동한다 가정하면 2층 메인 홀로 진입하기 전에 통과하는 연결통로는 성聖의 세계로 들어가며 거치는 첫 번째 전이 공간이 된다. 설계자는 일주문의 이미지가 느껴질 수 있도록 시작 부분에 캐노피Canopy를 설치했다. 또 진입방향 기준 왼편에 108개의 기둥을 세웠다. '108'은 '108 번뇌'를 상징한다.
일주문을 통과했으니 이제 천왕문을 통과할 차례다. 설계자가 설정한 두 번째 전이 공간은 2층 메인 홀에서 3층 브릿지Bridge로 연결되는 계단이다. 두 번째 전이 공간인 계단을 오르면 마지막 전이 공간 -전통사찰에서는 불이문 영역- 인 3층 브릿지가 나타난다. 이 브릿지는 동쪽에 전시실과 서쪽에 법당을 잇는다. 탄허박물관이 탄허를 기념하고 그의 생각을 강학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브릿지가 연결하고 있는 두 공간은 본 건물에서 궁극의 공간이다. 기능적인 측면에서 보면 서쪽에 있는 법당이 더 궁극적일 수 있지만 박물관 건립 목적에서 보면 전시실도 지지 않는다. 동선적인 측면에서 보면 계단을 오르자마자 바로 대하게 되는 전시실보다는 동선이 더 복잡한 법당이 더 궁극적이다.
전시실과 법당 중 어느 곳을 먼저 들어가 볼까 고민하다 동선의 방향을 따라 전시실에 먼저 들렀다. 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곡선 벽이 관람객을 빗겨 들어가게 한다. 설계자는 "불자들의 학당이라는 비일상적인 이 장소"가 가지고 있는 다른 그라데이션Gradation 중 전시실은 탄허 스님의 유품과 기록이 전시돼 있기 때문에 "엄숙함 수밖에 없고" 그래서 철이라는 무거운 재료가 이런 느낌을 전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Words from 이성관, 와이드 201009(no.17)-). 전시실을 나와 맞은편에 있는 법당에 들어서자 불상이 보였다. 불상은 빛의 우물 아래에 있다. 전통사찰에서 내부 조명은 한지를 바른 창을 통해 들어오는 은은한 자연광이나 호롱불 같이 낮은 광원이다. 반면 탄허박물관 내 불상은 높은 위치에 그것도 직접적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이 상황이 익숙하지 않다. 불상 뒤로 검은색 바탕에 금색 글자가 있다. 이 글은 원각경게송圓覺經偈頌이라고 한다.
불상 좌우측에 창이 있다. 그런데 모두 바깥에 바로 면한 창이 아니다. 창 밖에 또 하나의 공간이 있다. 창을 통해 바라보니 2층 강당의 단상과 그 뒤로 양각의 금색 글자가 새겨진 청동판이 보였다. 건물 입면과는 다른 방식으로 새겨진 금강경이다. 강당에서 보니 3층 본당은 2층 강당 가운데 떠 있는 형태다. 구조적으로 실제 떠 있을 수는 없으니 동서북쪽 벽에 있는 보Beam가 허공에 띄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집 속의 집'이다. 이 장면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탄허, 허공을 삼키다'라는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탄허'라는 그 알 듯 말 듯한 말을 공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글이에게 이 놀라운 발견(?)을 설명해주려는데 아이는 관심이 없다. 여전히 박물관 곳곳에 새겨진 한자를 찾아다니느라 바쁘다.
"아빠! 저 한자는 귀엽게 생겼는데요. 그런데 여기 한자 되게 많네요. 이분이 한자 박사예요?"
"음... 이분은 부처님인데... 뭐 아무튼 방글이가 한자를 보고 어떤 모습을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거야. 한자는 상형문자거든."
"상형문자가 뭐예요?"
"어떤 형태를 보고 모습을 만든 글자를 상형문자라고해."
아내가 나를 쳐다본다.
그 눈빛에 '아이에게 너무 어려우니 그만하라'는 뜻이 담겨있다.
허공에 떠 있는 본당과 '탄허'라는 법호를 설명하는 것도 아이에게는 어렵겠지. 그래서 그만두었다.
이 글을 쓰다가 문득 "요새 방글이가 머리를 열고 있는 건 뭘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새 아이는 저녁시간에 몇 게임씩 하는 '루미큐브'에 관심이 많다. '숫자'에 머리가 열려 있으니 수학을 가르쳐 볼까? 아이가 공부를 잘하려면 '아빠의 무관심'이 필요하다는데 여전히 나는 애 교육에 무관심한 아빠는 아니다. 그게 좋은 거라고 위로를 해야 하나?
설계자: 이성관&한울건축(2010)
주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밤고개로14길 13-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