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냐, 수어냐
지난 회의 이후 도서관에 돌아와 수어통역센터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사업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다 강연을 동시 통역할 수 있다면, 책도 바로 읽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지역 청각장애인은 고령자가 많고, 문해력이 낮은 분들이 많으니까 읽어주는 서비스는 좋은 방법 같았다. 한 달에 2번 정도 1시간 낭독서비스 할 수어통역사의 인건비 정도면 현재 도서관 예산으로도 충분히 부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 전 국립장애인도서관에 견학 갔을 때 벽에 붙어 있던 포스터가 생각났다. 일대다 대면 낭독 서비스에 관한 포스터였다. 프로그램명이 생각나지 않아 검색해 손책누리 사업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우리는 일대다보다는 문해력이 낮아서 책을 접하기 어려운 청각장애인에게 수어로 읽어주며,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질문도 할 수 있게 일대일로 진행하자 생각했다. 장애를 떠나 문해력이 낮아 책 읽기가 수월하지 않은 사람을 위한 서비스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읽기 쉬운 책처럼 필요하다면 정보를 수어로 설명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아가 수어 낭독을 하는 장면을 촬영하여 청각장애인을 위한 대체자료를 생산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도 들었다. 일타 몇 피인지 모르겠다. 도파민이 흘러나왔다.
사업의 의미도 있고, 예산도 적당해 보였다. 내가 알지 못하는 주의할 점이 있을지 국립장애인도서관에 문의했다. "우리 도서관에서 손책누리 사업과 같이 대면 수어 낭독 프로그램을 하려고 하는데, 진행과정에서 주의할 점이 있을까요?", "수어로 대화하는 건 1시간이 최대라 혹시 소설과 같이 분량이 긴 책은 요약도 하시나요?" 등 궁금한 것을 여쭈었다.
내 질문에 약간 당황하시면서도 반기시며, "특별히 주의할 점은 생각나진 않는다. 축약하기도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쉽게 풀어서 전달해야 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생각보다 책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손책누리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을 참관하고 싶다면 언제든 방문할 수 있으니 연락을 바란다는 말씀도 함께였다. 바로 수어통역사와 연락해서 가능여부를 문의했다.
나의 제안을 듣던 수어통역사는 아주 좋은 제안이지만 매우 어려운 과정이기 때문에 개별 도서관에서는 진행하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 본인이 마침 국립장애인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손책누리 사업에 참여하여, 그 과정을 경험해 봤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아마도 나와 통화했던 국립장애인도서관 수어통역사가 당황했던 것도 같은 이유였던 것 같다. 수어통역사가 설명하는 손책누리 사업이 가능하려면 아래와 같이 3단계의 과정이 필요하다.
① 기존 한국어로 된 도서를 농인이 이해하는 수어로 번역하는 일
② 번역한 수어 번역본을 교정하는 일
③ 교정이 끝난 번역본으로 수어통역하는 일
"그런데 선생님. 저번에 실시간으로 강연을 통역하신다고 하셨는데, 책 읽기는 많이 다른가요?"
"실시간으로 통역하면 많은 부분 축약되며, 강사님이 중요하게 전달하고 싶은 부분을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요. 내용에 30%도 전달할 수 있을지 미지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연처럼 책 읽기를 즉흥적으로 할 수는 없어요. 강연에서 다루는 책도 제가 미리 읽어보고 사전 번역을 할겁니다."
나는 양기관이 활발하게 논의를 하는 시점에 무언가 더 많은 시도 했으면 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지금이 아니면 흐지부지 될 것만 같았다.
"꼭 추진해보고 싶어서 무리한 얘기라도 한 번 드려보는 거예요. 혹시 통역사님께서 수어번역을 하고 ②과정을 생략한다면 어떨까요? 물론 틀린 게 있는지 점검은 필요하겠지만 검수과정을 간소화해 보는 거죠. 그리고 필요하다면 사서인 제가 번역할 책의 내용을 좀 축약해 본다거나 하면 작업량을 줄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비단 수어통역뿐 아니라 다른 언어 통역도 마찬가지겠지만 통역사마다 실력차이가 상당합니다. 부끄럽지만 저 또한 비장애인 수어통역사로 열심히 번역을 하더라도 온전한 의미 전달이 50%는 될 수 있을까 장담 못하겠어요. 축약이 문제가 아니라 농인의 세계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의미전달은 사실은 농인밖에 할 수 없는 건데, 그래서 농통역사가 필요해요. 우리 센터에도 농통역사 한 분이 계시는데, 제가 번역을 한다면 농통역사를 거쳐야 비로소 70% 이상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사투리를 아무리 완벽하게 따라 해도 결국은 따라 하는 것이지 원어민의 맛은 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통화를 끝내고 내가 수어를 한국어를 표현하는 다른 방법쯤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각장애인도 한국사람이니까 한국어는 기본적으로 이해할 거고, 그걸 수어로 옮기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한국어와 일대일로 대응되는 수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수어통역사가 원어민이라는 표현을 하는 걸보고 수어가 뭔지 궁금해 찾아보았다.
수화가 맞냐, 수어가 맞냐에서부터 시작했는데, 한국수화언어의 줄임말로 수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우리나라는 한국수화언어법을 통해 한국수화언어가 한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농인의 고유한 언어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한국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사람이고, 농인은 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사람인 거다. 이 두 언어는 문법체계도 다르고, 표현 방법도 다르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타게 된 것도 훌륭한 번역이 함께 했기 때문인 것처럼, 수어도 원어민 수준의 변역작업이 필요한데, 그 정도 수준의 통역이 가능한 사람이 현저히 적으니까 어려운 거다. 국가차원에서 해줘야 가능한 사업이 되는 거다. 이 좋은 사업을 사람들이 왜 그동안 안 했을까? 역시 이유가 다 있었던거다.
그럼에도 여기서 포기할 순 없지. 그럼 좀 더 쉬운 일이 없을까? 그다음 고민은 다음 글에서 이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