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도록..
어린 시절부터 나는 외국인이나 외국의 문화에 참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초등학생 시절부터 대학생 시절까지 늘 해외 영화에 심취되어 있었다. 물론 그 당시 우리 한국 영화계에도 '투캅스'나 '서편제' 등 재미있고 감동적인 메세지를 담은 좋은 영화들이 있었고, 90년대 이후로는 점점 더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왠지 나의 마음은 이국적인 풍경과 스토리, 색다른 가치관을 담은 해외의 영화들에 조금 더 쏠려 있었다. (지금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새로운 인사이트를 주거나 공감을 자아내거나 즐거움을 주는 모든 영화를 좋아한다. 특히, 봉준호 감독님의 오랜 팬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첫 영화는 초등학교 시절에 접한 '마이걸' (1991), '백투더퓨처' 시리즈이다. 마이걸의 두 소년, 소녀 배우들의 순수한 우정과 내면의 변화 등을 예쁜 화면에 그려냈는데, 정말이지 보는 내내 가슴이 몽글몽글 해지고 그들 부모님들의 삶의 모습이나 풍경 등이 내가 살아가는 한국 사회와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어 말 그대로 기분좋은 문화충격을 받았었다. 백투더퓨처 시리즈도 정말 몰입해서 본 영화인데, 폭탄 맞은 듯한 헤어스타일을 한 4차원의 박사님과 그를 따라 과거와 미래를 자유로이(?) 여행하며 여러 사건에 휘말리고 또 해결도 하는 귀여운 청년 주인공의 이야기다. 런던에서 현재 뮤지컬로도 상영 중이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보러 가고 싶다.) 이 때부터 영어에 대한 호감이 자라기 시작한 듯 하다. 영어 특유의 높낮이가 뚜렷한 억양이 마치 노랫소리처럼 느껴졌달까.
사실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한국 드라마도 너무나 좋아했어서 '모래시계' 광팬이었고, '여명의 눈동자', '사랑이 뭐길래'로 시작,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은 배용준과 김희선의 팬이 되어 그들이 나온 드라마를 모두 섭렵했었다. (아! '아들과 딸'도 나의 인생 드라마 중 하나다. 보는 내내 마음은 아팠지만..) 그렇게 영화와 드라마로 현실 세계에서는 채워지지 않는 나의 감수성을 채워왔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한국의 드라마는 가볍게 내 감수성을 톡톡 건드려주고 현실 세계에서의 스트레스 해소 및 잠깐 동안의 일상 탈출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뭔가 좀 더 깊숙한 나의 내면을 깨워주며 '이런 세상도 있어. 이렇게 살 수도 있는 거야.'라며 '삶의 태도나 가치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도록 도와준 작품들은 해외의 영화들이었다. '길버트 그레이프', '죽은 시인의 사회', '굿 윌 헌팅', '조 블랙의 사랑', '쇼생크 탈출', '마빈스룸', '그린 마일', '타이타닉', '트루먼쇼'까지... (이 외에도 많지만 일단 기억나는 것은 이 정도..) 고등학교 시절 유독 명작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정말이지 행복했었다. 이 영화들을 통해 자유, 사랑, 차별, 사회적 낙인, 진정한 교사의 모습, 순수한 인간애 등등 깊이있는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고 간접 경험할 수 있었음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시험이 끝나는 날이면 늘 비디오 가게에 가서 보고 싶던 영화의 비디오 테이프를 3~4개씩 빌려 집에 오자마자 그동안 미뤄뒀던 드라마와 영화를 보곤 했다. 한 달여 간의 시험 공부 기간 동안 모든 욕망을 꾹꾹 누르며 의자와 한 몸이 되어 기계처럼 공부만 하다가 마지막 시험날 오후, 점심도 안먹고 오전 중 모든 일정이 끝나고 나서 느끼던 그 해방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했고, 비디오 테이프를 꼭 끌어안고 집으로 오는 길에는 날아갈 듯 발걸음이 가벼웠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단체관람으로 중고 시절 중 유일하게 극장에서 본 영화인 타이타닉은 나의 인생영화이다. 잭 도슨의 '삶을 낙관하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태도'와 '자기 운명을 기꺼이 기쁘게 받아들이는 대범함', 또 그 안에서 행복을 꾸준히 느끼는 그의 능력, 기본적으로 사람을 존중하고 차별하지 않는 태도 (물론 가난한 서민이었지만, 그렇다고 부유한 사람들을 시기 질투하지도 않는 넓은 그릇.. 하... 정말 멋졌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사랑하는 여자를 살리고 죽음을 택하는 순애보까지.. 물론,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나 끝끝내 자기 마음이 향하는 진실한 사랑을 택한, 예술에도 조예가 깊은 로즈 도슨의 당당하고 진취적인 신여성 상도 내겐 적잖이 충격이었다. 정말 멋있는 삶의 태도라 생각되었다. 영화만큼 극적이진 않더라도 나도 그들과 같이 넓은 시야와 넓은 마음으로 살고 싶었다. 비록 당시의 내 현실 세계는 고통도 많았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한계도 있었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진취적으로 살면 나도 저렇게 멋진 사람이 되어가리라 꿈 꿨었다. 사실 그 노력은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이다. ㅎㅎㅎ
그 두 주인공의 서사도 좋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여러 번 다시 본 타이타닉이 나의 인생영화가 된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될 다양한 인간군상을 살아있는 캐릭터로 생생하게 구현해낸 데다가(심지어 대부분 실제 인물을 기반으로..), 그 중에 정말로 '귀하고 소중한 마음을 지닌 보물같은 사람들의 모습'이 마음을 울렸기 때문이다. 특히, 죽음의 문턱에서 마지막까지 승객들을 위해 연주하는 것이 자신들의 소명이라 여기며 동료들과 함께 연주를 하고,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고 고마웠다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연주자들의 모습, 보트에 이렇게 자리가 많은데도 사람들을 구하러 돌아가지 않을거냐고 소리치던 부유층 여자분, 단호하고 강한 목소리로 보트의 자리를 정리해서 실제로 로즈 도슨 포함 여러 명을 구조한 배의 선원, 그 외 끝까지 구명정을 내리고 승객 구조를 위해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 했던 그 모든 선원들...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고 덤덤하지만 비통하게 죽음을 택한 선장과 설계직원.. 아이와 여성들 먼저 보트에 태우던 남성들의 희생정신..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물론 우리의 죽음이 저들처럼 코앞에 있지는 않지만, 결국은 우리도 죽음이라는 엔딩으로 각자의 삶을 언젠가는 종결해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정말 후회없이 사람답게 살려면 어느 쪽을 향해야 하는지 내게는 너무나 극명하게 다가왔었다. 특히나 안그래도 깊게 타고난 감수성이 평소보다 배로 풍부했던 그 시절.. 툭 하면 눈물이 나왔던 그 시절.. 타이타닉 덕분에 삶의 방향을 어느 정도 잡을 수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후 간호사가 되겠다고 결심 후 진학한 간호학과 대학생 시절에는 한참을 일본영화에 빠져 지내기도 했었다. 관계가 늘 어려웠던 나는 인간관계를 넓혀가야 할 대학생 시절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세상에 대한 비관적인 시선으로 내 안에 침잠해들었고 그런 내게 친구가 되어줬던 것이 일본영화였다. 원래는 너무 싫어하는 공포영화를 강박적으로 보기도 했고 (스스로를 괴롭혔던 것 같기도 하고.. 좀 강해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4월 이야기', '철도원', '러브레터', '냉정과 열정 사이' 같은 감성적인 영화들도 참 많이 좋아했다.
돌아보면 그 당시 꽤 힘들었던 나의 삶을 지켜준 보석같은 영화들, 책들 덕분에 내가 이렇게 지금의 삶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영화, 책, 미술작품 등을 통해 위로받고 공감받는다. 정말 깊이 있고 삶에 대한 통찰을 담은 영화를 만들어주시는 분들께 그래서 참 감사하다. 사람 관계는 여전히 힘들다. 하지만 그런 나 자신이나 타인을 더 이상은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님을 이제는 알고 있기에, 그저 내 삶의 항로가 좀 복잡하게 설계된 것 뿐이기에.. 이제는 내가 방향키를 잡았으니 조금씩 조금씩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