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개들이 지우개가 아이들의 문해력을 망칩니다.

by 생각쟁이

선생님, 지우개가 또 없어졌어요."

아이들은 지우개를 잘 잃어버립니다.

어제 사준 것 같은데 돌아서면 지우개를 잃어버렸다 하고, 또 하나를 사다 주면 돌아서기 무섭게 또 지우개가 없어졌다고 하지요.

지우개 실종 사건은 교실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벌어지는 일입니다.

"정민아, 주변에 한 번 잘 찾아봐. 책상 밑이나 주변에 떨어뜨렸을 것 같은데?"

정민이는 찾아보는 듯하더니, 이내 포기하고는 말합니다.

"선생님, 괜찮아요. 집에서 가져오면 돼요. 집에 많아요."

"그래도 한 번 찾아보지? 네 물건인데…. 근데, 왜 집에 지우개가 그렇게 많아?"

"아, 엄마가 30개를 한꺼번에 주문하셨어요. 배송비 아깝다고요."

정민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교실 여기저기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선생님, 저희 집도요."

"선생님, 우리 집은 2박스나 있어요."

"저희 집엔 노트도 많아요."

"어, 우리 집에도요. 배송비 아깝다고 엄마가 엄청 많이 샀어요."

요즘 지우개, 연필, 노트 같은 학용품들을 대량으로 주문하는 일은 흔한 일입니다. 30개들이 지우개 한 박스, 연필 12자루, 볼펜 여러 개를 한꺼번에 주문하는 경우가 많지요.


출처 pixabay





그래서일까요? 아이들은 물건을 쉽게 잃어버리고, 또 쉽게 새것으로 바꾸는 듯합니다. 분실물함에는 주인을 잃은 지우개, 연필들이 가득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물건을 쉽게 잃어버리고, 쉽게 구매하거나 대량으로 구매하는 것은 자원 낭비일 뿐 아니라, 아이들의 문해력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학용품을 대량으로 구매하게 되면 구매 비용은 줄어들겠지만, 물건을 소중하게 여기는 아이들의 마음 역시 줄어듭니다. 같은 물건을 대량으로 구매하게 되면 그만큼 아이는 물건에 대한 '소중한 마음', 즉 '애착'이 사라지게 되지요.

대량 구매가 남긴 흔적은 생각보다 깊습니다. 지우개 하나를 잃어버려도 '찾아야 할 이유'가 사라지게 됩니다.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찾아보려는 수고도 하지 않을 것이고, 물건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역시 생기지 않습니다. 이미 아이에게 그 지우개는 그저 금방 대체할 수 있는 소모품이 되어버리니까요.

그러나 문해력이라는 것은 일상에서 사물을 대하고 의미를 발견하는 태도에서부터 길러지는 것입니다. 연필 한 자루, 지우개 한 개처럼 사소한 물건이라도 어떻게 사고, 어떻게 사용하는지, 그리고 내 지우개, 내 연필은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관찰하고 소중히 여기는 태도는 바로 관찰력과 감수성이라는 문해력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대상에 대한 '애착'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렸을 때 바로 사주거나, 이미 대량 구매해 놓아 바로 대체될 수 있는 물건이 있다면, 아이가 물건에 대한 소중함의 감정을 가지기는 힘들게 됩니다. 아이가 무언가를 사달라고 할 때 바로 사주게 되면 기다림이라는 감정을 아이가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즉각적인 편의를 제공하기보다는, 조금 불편해도 상황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함께 고민해 보기를 권합니다. 아이가 엄마 아빠와 함께 고민해 보면서 아이는 문제 해결력을 키우게 될 뿐만 아니라, 자기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힘도 함께 성장하게 되니까요.

연필을 대량으로 미리 구매해 놓는 대신, 아이와 함께 문구점에 가서 필요한 만큼만 사 주세요. 사물의 소중함을 알게 되면, 아이는 주변 사물도 소중하게 보고 세심하게 관찰할 줄 알게 됩니다.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달라고 할 때는 바로 사주기보다는 "왜 필요한지, 언제, 어떻게 쓸 것인지"에 관해 아이에게 물어보세요. 그리고 하루 이틀 정도 고민해 본 뒤 스스로 결정해 볼 수 있도록 해 주세요.

기다림의 시간 동안 아이는 진짜 이 물건이 필요한지, 물건의 쓰임을 생각하게 되고, 고민 끝에 사게 된 물건에는 아이가 더 애정을 가지게 됩니다. 일상에서 생각과 감정의 확장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아이가 세상을 관찰하고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힘은 단순히 책을 읽고, 문제집을 풀어서 길러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께서 일상에서 어떤 태도를 보여주느냐에 더 큰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물건 하나를 다루는 방식, 일상 속 사소한 행동들 속에서 아이의 문해력의 작은 근육들이 차곡차곡 자라나게 됩니다.

그러니, 오늘부터는 아이에게 대량으로 학용품을 구매해 주는 대신, '기다림과 느림, 그리고 소중함'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줘 보시는 건 어떨까요?


작가의 이전글좋은 사람 곁엔 좋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