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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helger Mar 04. 2017

찬란하고 콤콤한 일상

런던 위 에든버러 3.- 마이클의 무뚝뚝한 마법이 통했던 게지!

프린지 페스티벌이 한창이던 8월 런던에서 출발한 기차는 북으로 북으로 향했다. 잔잔하게 파도치는 해안가에는 붉은 박공지붕을 얹은 건물들이 아름답게 줄지어 있었고, 그 예쁜 마을들을 지나가며 차창 밖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다보니 기차는 어느새 종착역인 에든버러 역에 도착했다. 거의 4시간 정도 달렸을 뿐인데 풍경이며 집이며 심지어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마저 확 바뀐 느낌이 든다. 시간여행이란 것이 이런 거겠구나...


돌이켜보니 뉴타운의 거의 끝부분에 숙소를 정한 것은 에든버러의 동서남북에 대한 감각이 전무하던 때였기에 가능한 여행 신의 선물이었다. 그곳에서부터 그렇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르내리던 올드타운 쪽으로 향하는 길에서 그리고 밑으로 리스(Leith)로 향하는 길의 골목골목에서 에든버러의 찬란하고 콤콤한 일상을 조금씩 훔쳐보았다.


마이클의 air b&b 숙소


거무스름하게 변해가는 사암으로 지은 집들이 바둑판같이 정렬되어 있는 뉴타운은 방직공장 노동자들을 위한 연립주택단지를 연상시켰다. 여행자들이 뭐 볼 것 없다고 뉴타운을 폄하하는 데는 이 인상이 한 몫했을 것이다. 단단하고 폭풍우가 몰려와도 견딜 수 있는 우직한 돌집, 마치 <폭풍의 언덕>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을 법한 그 단출한 돌집의 이미지는 사실이었지만 그건 다각형의 한 면일 뿐이었다. 불 밝힌 펍을 찾아 뉴타운의 한적한 골목으로 동네 사람들이 들락거리기 시작하는 저녁이면 화려하고 장엄한 올드타운과는 다른 정취로 뉴타운은 변신했다.


여하튼 그날 나는 올드타운을 들락거리다 뉴타운으로 내려오며 이렇게 황량한 곳은 신화와 전설로 포장하고 마법이라도 써야 살만 할 거라고 구시렁거리던 중이었다.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챘는가 숙소 주인인 마이클이 나에게 리스에 한 번 가보자고 제안한다. 한여름인 8월에도 냉기 가득한 공기에 바닷바람은 사정없이 몰아치고 추적추적 비도 오락가락했다. 하지만 한적한 바닷가 마을같은 이곳이 한때는 조선업으로 유명했던 곳이 바로 그 '리스'라고!


운전 중인 마이클
눈길 닿는 곳마다 영화 세트장 같은 건물들, 해리포터에 실제로 나온 장소라고 한다.
아기자기한 카페와 레스토랑이 많은 리스

리스를 가자는 것은 핑계였는지 모른다. 뉴타운에서 리스로 차를 몰며 마이클은 연신 "저기는 사립학교인데 마법사 학교로 나온 곳이고, 저기는 거기 말 타고 경기하던 그곳이고, 저기 저 뒤의 나무가 영화에 나온 거고, 이쪽으로 가면 유명한 종마장이 있고, 그럼, 맞지 저 쪽 편에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야, 여긴 물맛도 최고고!"

 

마법사가 날아다니고 요술 지팡이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그런 대 놓고 마법이 아니라, 차를 운전하던 마이클의 말문이 열린 것이 마법인 것처럼 자부심 강한 스코틀랜드인의 사투리 설명이 연신 계속되었다. 아, 정말이지 모퉁이를 돌 때마다 '우와!'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풍경과 육중한 건물과 아름드리나무들은 놀라왔다. 4월이나 5월에 오면 무척이나 아름다운 연분홍 벚꽃 천지일 것이 분명한 공원도 시선을 나꿔 챘다. 아기자기한 카페와 마슐렝 1 스타에 빛나는 'The Kitchen'도 이 한적한 리스에 보물처럼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게 아닌가! 그러나 무엇보다 한눈에 들어오는 리스 시내의 그 적막함과 소도시에서 풍기는 궁핍한 인상도 실망스러울 정도로 '아.,'하는 신음소리를 내게 했다.


하지만 이 뜬금없는 물맛 자랑이라니! 마이클은 뜨내기 여행자를 '두들리 크레센트'라는 골목에 데려다주며 마치 해리포터 속에 나오는 두들리를 만날 것 같은 마법을 선사하다가도, 물맛 좋은 일상이라는 바닥에 툭! 하고 내려놓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저 모퉁이 뒤의 국제적인 레스토랑으로 이끌기도 했고 다시 매력적인 동네 펍으로 데려가기도 했다. 마이클은 노동자 동네 같은 뉴타운과 한적한 리스의 일을 멋진 마법 속 세상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갑자기 일상이 찬란해보였다.


마이클의 목소리에선 과거 번성했던 시절에 대한 추억과 향수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아름다운 이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 묻어났다. 여행자의 귓전을 울리는 그 목소리에는 뉴타운에 걸려 있던 그 많은 'to let'에 대한 이유와 '영어'를 가르칠 수도 있다는 아저씨의 셀프 홍보가 안쓰러울 정도로 진득하니 깔려 있기도 했지만, 이곳의 전통 음식인 하기스를 꼭 먹어봐야 한다며 알파벳까지 적어주실 때는 영낙없이 자부심 강한 한국인 같기도 했다.

하기스와 두툼한 패티가 든 버거

 

한낮의 리스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뉴타운의 골목골목에는 다양한 펍이 유혹적인 불빛을 비추고 있었다. 회식 자리인 듯 떼 지어 들어가는 무리들! 한여름 밤의 정취가 묘하게 어우러지는 돌집 안에서는 사람 소리와 노란 불빛과 음악 소리가 함께 흘러나왔고 그렇게 모든 것이 어우러진 멋진 곳들이 저녁이 되자 하나둘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돌집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저 아름다운 아르데코 장식의 전면 풍경 때문인가 그것도 저것도 아니면 저 노란 불빛 때문인가 저렇게 아늑해 보이는 펍은 오직 이곳 에든버러에서만 가능할 것 같았다. 에든버러의 바람이 미치지 못하는 돌집 안에서 마시는 테넌츠 라거의 알코올은 분위기를 타고 한껏 뺨으로 올라왔고 이 와중에도 생전 처음 먹어보는 하기스는 따뜻했고 맛있었다.


꾸득하게 잘 말린 생선처럼 콤콤하고 맛있는, 뽀글뽀글 거품 올라오는 신선한 막걸리처럼 그 곳만의 향으로 기억되는 곳이 있다. 내가 만난 현지인 마이클은 누가 보아도 힘들어 보이는 일상과 남루한 현실을 멋진 마법의 세계로 바꿔 놓은 마법사였다, 그것도 참 묘하고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마법같은 하루가 내게 선물로 다가왔다. 

여행, 풍경에서 사람으로 옮겨가는 여정!


글, 그림 모두 Arhel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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