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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helger Mar 17. 2017

내 이름은 빨강

런던 여행 11 - <도서관>이라는 이름의 금고, 영국 국립 도서관

1591년 겨울, 눈으로 뒤덮인 이스탄불의 어두운 밤. 오직 한 여인만을 사랑하기 위해 고향을 떠났던 사나이가 흩날리는 눈발을 헤치며 12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그에게는 일생을 세밀화에 바친 어느 금박 세공사의 비참한 죽음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슬람 세밀화의 위대한 전통을 이어갈 밀서 제작을 완성해야 하는 임부가 주어진다. -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


오르한 파묵이 노벨문학상을 받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 작가를 알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런던 '영국 국립 도서관 britsh library'에서 세밀화를 찾아보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터키 작가, 전근대가 근대라는 시기로 들어서면 '나'를 의식하던 시기에 대한 고찰, 단숨에 읽어 내려가다 보니 촘촘히 짜인 추리 소설 구조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도 닮았고 집현전 작가들의 미스터리 한 살인 사건을 다룬 <뿌리 깊은 나무>와도 닮아 마치 세 쌍둥이 책처럼 다가왔었다.

세가지 책, 모두 두 권짜리, 모두 추리소설, 세 쌍둥이가 맞네!



다중 시점이어서 그것도 사물과 인간이 모두 각자의 시점에서 한 챕터씩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고 있어서 마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나 <공각기동대> 만화처럼 상상력을 마구 자극하는 책이다.  <내 이름은 빨강>에는 '세밀화'가 등장한다. 세밀화가 뭐지? 인물 표상을 금지하는 이슬람답게 기호와 문양과 서체에 입힌 세밀화의 채색이 이루 형언할 수 없이 화려하다는 말을 들었다. 독일에서 어렵사리 구해 온 터키 카드에서 어렴풋이 세밀화가 어떤 것이겠거니...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었다. 서책이나 귀중한 코란에 그려진 세밀화는 화려한 이슬람 회화의 결정판일 것이다.

 

오르한 파묵의 터키어 버전 <내 이름은 빨강>
터키 카드 속의 세밀화, 이 카드를 구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아쉽게도 한국 내 주변에서는 코란조차 제대로 구경할 수 없었다. 이태원이 코앞인데도 지리적 여건이 마련해 준 문화적 다양성은 이상하게 낯설었고 다가갈 수 없는 인간적인 장벽이  존재했다. 한국에서 나는 열린 문 앞에서도 주저주저하는 영락없는 수줍은 도보여행자였던 것이다. 내가 런던 여행에서 가장 기대한 곳은 바로 영국 국립 도서관이었다. 세계 문화의 수장고 역할을 자청하는 영국의 자랑스러운 이 도서관에 <쿠쉬나메>를 비롯하여  상당량의 한국 고서도 있다고 하니 세밀화 한 점 정도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도서관 앞에서 웅크리고 있는 뉴튼을 보자 가슴이 뛰었다. 오늘은 빨강 사과가 어울리는 날이다!


뉴튼의 대형 동상 앞에서


1455년경 마인츠에서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 인쇄로 42경 성경을 인쇄해 내었다. 내 귀에는 르네상스의 서막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활자의 독점,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는 기득권의 특권이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그것도 대량으로 인쇄되어 보급되면 그것이 곧 권력의 분배와 기득권의 상실로 이어질 것은 뻔한 일이었다. 서양문명이 이렇게 대대적으로 중세의 틀을 깨고 근대의 골목으로 넘어가는 시기가 어떻게 이슬람 문명과 충돌하는지를 파묵은 <내 이름은 빨강>에서 그려 내었다. 세밀화 화가의 죽음이라는 아주 상투적인 포맷 속에서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대의 가치혼란, 서양 문명과 수천 년을 이어온 이슬람 문화 전통과의 충돌을 씨실 날실로 삼아 섬세한 세밀화를 짜 넣은 것이다.


도서관을 들어서면 나타나는 로비 전경

영국 국립 도서관을 찾아갔을 때는 <마그나 카르타, 법, 자유, 유산>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저절로 "대박"이라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대헌장이야말로 무소불위였던 왕의 권력을 시민이 가져온 법률적 발판이었으니 되돌이켜 보면 권력의 전횡에 비폭력으로 항거하는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아주 귀중한 전시를 본 게 아닐 수 없다. 물론 존 왕은 대헌장에 자발적으로 조인하진 않았다. 자유는 피를 먹고 자란다 했던가! 존 왕에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런던 시민이 동조하여 런던 시내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는데 결국 왕이 굴복하게 되면서 대헌장 <마그나 카르타>에 조인한 것이다. 영국 헌법의 근원이 된 대헌장의 주요 내용은 왕의 과세권 제한과 자유민의 보증, 대헌장의 존중 등이었다. 이 대헌장을 직접 보게 되다니 아마 여행 신은 이번에도 나와 함께 하고 있나 보다.

때론 감상을 돕는 촬영금지 푯말

물론 나는 세계 흐름에 역행하는 "사진 촬영 금지"라는 푯말에 대실망했다. 곳곳에서 감시하고 있는 검은 제복의 사람들! 글쟁이의 글빨이 아무리 서슬 시퍼렇고, 때로는 아무리 입 속의 혀처럼 살살 녹는다 해도 어디 그럴듯한 사진 한 장과 비교할 수가 있나! 마셜 맥루한은 <구텐베르크의 은하계>를 서술하며 활자 인간의 종말도 고했고 이모티콘과 이미지의 시대인 포스트모던 시대에 그의 진단은 여전히 유효성을 입증하고 있다, 그래서 나 혼자 보게 될 전시회가 아쉽기도 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전시였다! 정갈한 공기, 쾌적한 습도, 적절한 스폿 조명, 플래시 터트리는 무감각한 관람객도 없었고, 어디서 찰칵하는 셔터음도 없었다. 오직 빛을 오롯이 받고 있는 유리창 너머의 책들에 집중하는 시간, 아니 시간을 초월한 시간이었다. 정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활자 유산들이 총망라되어 있는 것 같았다.


검은 히잡을 두른 깊은 눈길의 여성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큰 흑갈색 눈에 검은 마스카라를 짙게 칠한 아름다운 낯의 사람들은 조용하고 경건하게 채색화를 관람하고 있었다. 노란 조명을 받으며 눈부신 형형색색의 색채를 품어내는 크고 아름다운 코란을 나도 가만히 쳐다보니 뱀이 빛을 받으면 저리 빛날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글자는 휘어지고 틀어지고 하늘로 솟구쳤다 다시 길게 옆으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그 건너편의 채색화는 아름다운 글자 한편에 꼬물거리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돋보기로 들여다보아야 할 만큼 작고 섬세한 그 붓터치는 "아....!"하는 감탄사를 연신 터트리게 했다. 그것은 차라리 금은세공에 버금가는 정교하고 세밀하고 화려한 작업이었다. "filigrant.......!" 금실과 은실을 엮는 고난도의 금은세공, 그 정도로 야무진 손끝이 필요했을 세공품이었다. 온갖 단어가 떠오르며 머릿속에서는 아주 난리가 났다. 처음 대하는 이 낯설고 압도적인 경험에 어떤 단어가 적합한지, 나의 경험과 학습으로 조성된 언어의 밭에서 어떤 단어를 꺼내와야 할지 나의 두뇌도 감을 못 잡는 모양이었다.


출처:https://metinakgun.wordpress.com/2015/02/19/bir-orhan-pamuk-okumasi-benim-adim-kir


"...그렇지만 색이란 아는 게아니라 느끼는 거지."
"그렇다면 자네는 한번도 빨간색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빨강의 느낌을 어떻게 설명하겠나?"
"손가락 끝으로 만져보면 그 느낌이 철과 동의 중간쯤 되지.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뜨거울 테고. 손으로 쥐어보면 소금기가 아직 남아 있는 물고기처럼 느껴지겠지. 입에 넣으면 입 안이 꽉 찰 테고. 냄새를 맡으면 말 냄새가 나겠지. 꽃의 향기로 치면 붉은 장미보다는 국화 향기와 비슷할 걸세." -<내 이름은 빨강> 322~323쪽.


한글 해례본도 한 점 빛나고 있었다. 예상은 했으나 서먹하고 대면 대면하고 낯선 우리의 것이었다. 왜 이 책이 여기에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영국 국립 도서관에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들어온 한국의 고서가 많다. 영국 국립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 고서 가운데는 의궤, 지도, 문집 외에 상당수의 방각본이 있는데, 특히 경판 한글소설은 35종이나 된다고 한다. 그중 한 점을 만난 것이다. 무려 8만 점이 넘는 고대 그림첩을 이곳에 두고 있는 일본의 심정도 착잡할 것 같았다. 그 중에서 나에게 파란색으로 진하게 각인되어 있는 "Katsushika Hokusai 카츠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The Great Wave Off Kanagawa>도 볼 수 있었다.  

Katsushika Hokusai 'The Great Wave Off Kanagawa' 에도시대, 영국 국립 미술관 소재, 출처: google.de


색감이 무척 예뻤다. 소중하게 간직할만한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독일 작가들의 글에서 빈번히 등장하던 저 이름 '호쿠사이'를 보니 그대도 왜 이리 반가운지! 멋지구나....


영국 국립 도서관은 세인트 판크라스 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해리포터가 마법의 세계로 사라진 간이역이 설치되어 있는 이곳에서는 늘 머플러 휘날리며 열리지 않는 벽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전문요원이 머플러가 흩날리도록 잡아주고 사람들은 열심히 날아오르는 포즈를 취하느라 정신이 없고 각종 실패한 포즈가 연출된다. 뒷 줄은 길고 실패 후 다시 하긴 너무나 민망하다. 그래도 보는 사람은 신이 난다. 사진을 다 찍었으면 이곳에서 나와 왼쪽으로 길을 꺾으면 된다. 그러면 마치 오래된 고성 같은 호텔이 시선을 낚아챈다.



이 호텔을 지나 좀 걸어가면 바로 도서관이 나온다. 이 영국 국립 도서관은 그냥 지나치기 참 아까운 곳이다. 이 아름다운 호텔처럼 눈에 띄지도, 화려하고 웅장하지도 않지만 배를 닮은 영국 국립 도서관에서 지식의 바다를 항해하듯 유영해 보는 여행은 꽤 괜찮은 사치다.


글, 사진 Arhel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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