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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iss Oct 01. 2017

피로와 파도와


예측하기도 전에 바다가 나왔다.

좋다, 라는 말이 툭 튀어나오고 조금 불안해졌다.

서울 한 바닥에서 만나지 못해 바라고 기대해왔던 장면이 문득 눈에 들어오니 

나는 그것을 오롯이 즐기지도 못한 채 괜한 걱정이 밀려왔던 것이다.


무엇에 홀린 듯 쇼핑을 하던 때가 생각났다.

지금 막 가라앉고 있는 기분을 들쑤시려면 무언가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게 답이라고 믿었다. 

여유치 않은 생활 자금을 잊지 말자, 살리고 조이는 그 경계선 안에서

무지 많은 먼지들을 휘날리며 옷을 휘젓고 다니다

가격도 모양새도 그만 저만 괜찮은 옷 하나를 고를 때 

자신이 짠하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고 현명하다고 믿고 싶기도 했다.

그런 옷이 집으로 가면서 잊힌다.

그리고 매년 왜 이리 없어 보이는 더미를 바라보며 

돈으로 옷을 산 게 아니네, 

돈으로 자존심도 조금 사고 위안도 조금 샀다. 그런데 지금 또 없다.

이러고 자주 있는 것이다.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모르겠다.

좋다는 말을 뿜게 만들었던 바다의 완벽한 흰 푸른빛이 

누군가의 오물로 더러워질 수도 있고 

한 무리의 고성으로 퇴색되어 버릴 수도 있겠다.

근거 없는 불안들이 어느새 나와 같이 조개껍데기를 줍고 있었다.


시를 매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범한 사람의 범주에서 자꾸만 내모는 불안감을 잠재우려면 지금쯤 시 한 구절을 맴맴 읊을 수 있어야 한다.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스치듯 지나간 것들이 있다고 쓴다

눈물과 허기와 졸음과 거울과 종이와 경탄과

그리움과 정적과 울음과 온기와 구름과 침묵 가까이


소리 내 말하지 못한 문장을 공책에 백 번 적는다

씌어진 문장이 쓰려던 문장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피로와 파도와 피로와 파도와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 이제니, [피로와 파도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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