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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iss Nov 26. 2017

비창3악장

몸이 기억하는 것들

베토벤의 비창 3악장은 초등학교 고학년 때인가 콩쿠르를 나가기 위해 준비했던 곡이다. 

그리고 얼마 전 구입한 건반으로 들리는 곡들을 뚱땅거리기 시작하다가, 문득 떠오른 이 곡을 더듬더듬 손과 함께 기억해내었다. 이상하다. 머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손가락은 알고 있고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빠르게 내려오는 음들을 손가락이 알아서 짚고 있었다. 욕심이 났다. 7장이 되는 악보를 출력해 한 음, 한 마디 다시 짚어내려 갔다. 결국 두 줄의 악보 끝을 보는 순간, 또다시 앞으로 돌아왔고 조금 더 빠른 속도로 음을 내었다. 그다음에는 좀 더 정확히 쳐보고자 했다. 아까보다 느리더라도 음이 음을 무는 것들을 줄이고자 했다. 머리보다 손과 마음이 앞서게 되면 다음 음표가 앞의 음표를 먹어버리는 일이 생긴다. 강약보다도 한 음 한 음 모든 음이 주인공이 되어보자 했다. 마무리를 한 후, 다음에는 감정을 실었다. 음이 조금 음을 물더라도 속도가 약간씩 변동을 하더라도 마음 가는 대로 쳤다. 몸이 앞뒤로 양옆으로, 물에 맡겨지듯 흔들렸고 눈코입도 덩달아 씰룩거렸다. 

백건우 피아니스트의 이 곡을 들어 보았다. 감정, 박자, 음. 내가 따로 주의를 기울여 쳤던 모든 것이 한 곡에 녹아들어야 곡이 완성되는구나. 그런데 또 다른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었다. 이 사람의 곡은 감정에 더 무게를 실은 듯하였다. 분명 다 같은 악보를 보았을 터인데 다 달랐다. 


어느 순간이 제일 좋았느냐 생각해 보았더니, 우선을 정하기 전에 나는 세 가지가 주는 느낌의 다름을 분명히 느끼고 있고 아마추어가 느끼기에 이 다름을 구분하고자 하니, 왠지 모든 요소가 녹아버리고 마는 그 천재성에 한 없이 멀어지는 듯한 평가를 내가 자신에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운전한다고 해놓고는 작고 예쁜 새 차가 주차장에만 두 달째 서 있다. 세 번 인가 적지 않은 거리를 연습 삼아 다녀온 것이 한참이 지난 후 또 한 번의 기억을 더듬어 손과 발과 전신을 움직인다. 헛되지 않았구나, 깨닫는 날이다.


영리함은 머리가 담당한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분명 머리가 하지 못하는 것들을 영리하고 부지런히 해내고 있었다. 눈으로 아름다운 그림과 영화들을 더 많이 보고, 코로 꽃과 맛있는 김치찌개의 냄새를 기억하며, 손으로 두부와 피아노를 만지고, 발로 빠르게 딛는 조깅의 순간을 더 많이 만들어야겠다. 새로운 바람을 몸이 천천히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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